바둑 격언에 ‘정석은 외운 뒤 잊어버려라’란 말이 있다.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정석은 좋은 가이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만 너무 얽매이다 보면 주변 상황을 인지하거나 응용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다. 검도의 수파리(守破离) 역시 비슷한 뜻을 담고 있다. 가르치는 대로 배우고 익혀,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가려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초월해 하나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이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간극은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에 비해 한없이 넓다. 바둑은 특히 이 부분이 강조되는 스포츠. 여러 기술을 알면 아마추어 3단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단계는 모든 게 이해의 영역이다. 대부분의 프로들이 입문 1, 2년 만에 3단에 도달하지만 프로가 되는 데 10년이 넘게 걸리는 이유다.
일견 당연해 보이는 흑1의 압박에 변상일 9단은 백4, 6을 교환한 후 백8에 밀어간다. ‘상대방 등을 밀어주지 말라’는 격언에 위배되는 선택. 그러나 이 장면에선 격언을 깨뜨리는 창조적인 한 수였다. 3도 흑1로 받아주는 것은 백2, 4의 차단 후 백8의 압박이 좋은 수. 백10, 12가 선수인 게 기분 좋다. 백18까지 백이 두터운 형태. 결국 박영훈 9단은 실전 흑9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백이 백12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앞서 놓인 흑1, 3을 악수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백20까지 백이 다소 우세한 형세. 흑31, 33의 선택 역시 평상시라면 부분적인 정석 수순. 그러나 지금은 손을 빼고 4도 흑1로 우변을 막아두는 게 더 중요했다. 좌상귀는 백이 먼저 두더라도 백2, 4가 전부. 실전 백38이 날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