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지기에 빌려준 통장, 나 몰래 사기에 쓰여… 대법 "손해배상 책임 없어"

입력
2024.09.0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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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빌려준 계좌… 사기 악용
1·2심 모두 "공동불법행위자" 인정
대법원 "불법행위 사용 예견 못 해"

친구에게 빌려준 통장 계좌가 사기 범죄에 쓰였을 경우, 이를 예견할 수 없었다면 계좌 주인이 피해자에게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은 없다고 대법원이 판단했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투자자 A씨가 계좌 주인 B씨를 상대로 낸 대여금 등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지난달 1일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B씨는 30년 이상 알고 지내던 고등학교 동창 C씨가 금융 거래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2011년부터 자신의 통장을 빌려줬다. C씨는 B씨 계좌를 위험성 높은 해외선물 투자에 이용했다. 그러다 2020~2021년 A씨에게 투자금 1억2,000만 원을 받고 돌려주지 않은 채 잠적했다. C씨는 B씨를 사칭해 반환약정서까지 쓴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계좌 주인인 B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투자금 1억2,000만 원을 반환하거나 동창인 C씨의 사기 범죄를 방조한 책임이 있다는 점을 들어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취지였다. 1심과 2심 재판부 모두 A씨 주장을 받아들여 배상금 6,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B씨가 계좌가 범죄에 이용될 수 있단 점을 인지했다고 보고, 공동으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인정한 것이다.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B씨가 이 사건 계좌를 양도해 C씨의 입출금 및 주식투자 거래가 이뤄지리라는 것을 넘어 투자 사기와 같이 불법행위에 해당하는 거래가 이뤄진다는 점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볼 만한 사정이 없다"고 판단했다. B씨가 계좌를 빌려주면서 특별한 대가를 받지 않았고, 2021년 말까지는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점 등이 근거였다. 계좌 사용을 허락한 이후 B씨는 이용 현황을 확인하지는 않았는데, 대법원은 "이러한 점만으로 C씨의 불법행위에 도움을 주지 말아야 할 주의의무를 위반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결국 대법원은 "원심 판결에는 과실에 의한 방조로 인한 공동불법행위책임 내지 불법행위와 손해 사이의 상당 인과관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면서 원심을 파기했다.

이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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