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이 시작하면 중년 여성이 등장해 자신을 객관화하며 말을 건넨다. "예일대 문예창작과의 중년 교수가 청중 앞에 서 있습니다. 그녀는 그들을 잘 볼 수 없지만 그들은 저 밖에 있습니다." 소설의 한 대목을 읽는 듯 나긋하게 발화하지만 분명 관객을 향한 말이다. '제4의 벽(무대와 객석을 분리하는 보이지 않는 가상의 벽)'을 넘어 관객에게 건네는 그 말은 대답을 요구하진 않는다. 관객을 인지하고 있는 연극 속 캐릭터에 어떤 거리를 둬야 할지 당황한 관객은 서서히 인물과의 거리를 조율해 가며 극에 몰입한다.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는 미국 예일대 문창과 교수 벨라(문소리, 서재희)와 소설을 쓰는 제자 크리스토퍼(이현우, 강승호, 이석준)가 문학을 통해 서로의 외로움을 공감하며 삶의 아픔을 나누는 이야기다. 벨라는 첫 소설로 문단의 주목을 받은 후 17년간 새로운 작품을 내지 못했다. 암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자신도 위암 진단을 받았다. 곧 부서질 듯 건조하고 단조로운 그의 삶에 크리스토퍼가 노크도 없이 끼어든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수업 중 학생 크리스토퍼가 "언젠가 나도 그런 장면을 쓸 거야"라고 말을 던진 것이다. 특별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지 않은 이 도발적인 말 이후 크리스토퍼는 면담 요청도 없이 벨라의 연구실을 방문한다. 그리고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소설에 대해 들려준다.
벨라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이메일에 적대감을 보이며 다혈적 감정을 드러내는 크리스토퍼가 불편하면서도 그와 나누는 문학 이야기가 반갑다. 소설 아이디어에 대해 조언하며 나누는 수많은 작가와 작품 이야기로 벨라는 새로운 열정에 사로잡힌다. 예술 취향이 닮은 둘은 급격히 친해지며 문학을 넘어선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진다. 사회적 지위와 나이 차이, 각자의 상황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성적 긴장감이 팽배하다. 작은 불씨에도 금방 큰불로 번질 수 있는 감정이 둘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작품은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미묘한 긴장감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둘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분명한 이성적 끌림이 있고 이를 방해하는 현실 규범이 끌림을 더 자극하지만 로맨스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문학만 사랑하는 외로운 존재로서의 교감이 둘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벨라와 크리스토퍼의 다층적 관계는 벨라가 화자가 돼 들려주는 방식으로 서술되면서 독특한 긴장감이 발생한다. 크리스토퍼가 화자가 되거나 극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있으나 벨라의 서술로 전개되는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러한 객관화 전략은 냉정한 이성적 판단을 요구하는 브레히트식 전략과는 다르다. 오히려 극적 상황을 단조로운 톤으로 서술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내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특별한 무대 구조물 없이 간단한 소도구로 열어 둔 공간에 벨라의 목소리만 머문다. 텅 빈 공간에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는 외로운 벨라의 상황을 드러낸다. 객석을 향한 소리이면서도 어둠 속 관객과 단절된 소통은 그의 외로움을 배가한다.
작품 제목 '사운드 인사이드(내면의 소리)'는 벨라가 수업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학생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일에 대해 멈추지 말고 수업 시간 내내 쓰라고 한다. 그 시간에 벨라 역시 같은 과제를 수행한다. 일정 시간 이후 벨라는 '리슨 투 더 사운드 인사이드'를 반복적으로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는 이 말은 후반부 반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2020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 소개된 이 작품은 올해 영국 런던 초연에 앞서 이달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도 선보였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일 테노레' '번지점프를 하다' 등 맡은 작품마다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은 박천휴 극작가 겸 작사가가 윤색과 연출을 맡았다. 서정적이면서 문학적인 가사와 내면의 감정을 잘 담아낸 그의 글처럼 내면의 풍경을 섬세하게 표현한 연출이다. 올해 10월 27일까지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