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 채제공은 분홍색 관복 입고 '조선시대 버전의 니치 향수' 향낭을 들었다

입력
2024.08.2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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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림박물관, 향 문화 특별전
'향(香), 푸른 연기 피어오르니'
국보 '금동합과 향' 등 170점 전시


돌솥에 차를 달여 술 대신 마시며 (石鼎烹茶代酒巵)
화로를 끼고 둘러앉아 옷을 말리누나 (擁爐圍坐熨寒衣)
향불은 푸른 연기가 뭉실 날아오르고 (香畦縈穗靑烟直)
귤을 쪼개니 흰 즙이 이슬처럼 흐르네 (橘腦分漿玉露飛).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중에서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1168~1241)는 지인의 집을 찾아가 이런 시를 지었다. 한겨울 다실의 화로 옆에 앉아 차를 달여 마시던 이규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희푸른 연기였다. 향나무 가운데 부분을 불에 사르면 연기가 하얗다 못해 파란색으로 피어오르는데, 이 모습을 푸른 연기로 표현한 것이다. 당시 문인과 귀족들은 차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눌 때 늘 향로를 옆에 두고 향을 피우는 풍류를 즐겼다. 분향의 오묘한 경지를 사랑했던 이가 이규보만은 아닌 셈이다.

호림박물관의 서울 강남구 신사분관에서 열리는 '향(香), 푸른 연기 피어오르니'는 한국인의 향 사랑을 조망하는 전시다. 향과 관련된 그림, 공예품 등 작품 170여 점을 통해 한국 문화 속 향의 의미와 역사를 살펴본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공수한 국보 '금동합과 향'과 '금동향로'를 비롯한 보물 11점이 포함됐다.


분향, 의례 문화이자 고급 취향

향을 만드는 재료와 분향 도구를 소개한 '여향, 함께한 향기' 섹션에선 한반도에 향 문화가 정착한 과정을 짚는다. 고구려 무덤벽화에 그려진 향로, 백제시대에 건축된 전북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출토된 향합(향을 담는 뚜껑이 있는 그릇), 통일신라시대 유적에서 확인된 각종 향로를 통해서다. 유진현 호림박물관 학예연구부장은 "미륵사지석탑에서 나온 국보 '금동합과 향'에는 당시 사용했던 유향(乳香·아라비아반도에서 자생하던 유향목의 수액을 말려 만든 향 )이 남아있어 가치가 크다"며 "석탑 내부에서 유향이 나왔다는 것은 당시 불교 의식에서 중요하게 사용됐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공향, 천상의 향기' 섹션에선 향의 종교적 의미를 살핀다. 불교의 분향 의례는 역사가 깊다. 향을 피우는 건 부처님에게 바치는 공양인 동시에 수행자의 마음을 다스리는 행위다. 분향 의례에 사용된 향로는 조형과 장식이 뛰어나 불교 공예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유교의 분향은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이었다. 유교 의례에 쓰인 향로는 유기, 도자, 돌 등으로 단순 간결하게 만들어 조선 공예미를 보여준다.

'완향, 애호의 향기' 섹션은 향을 즐긴 선조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향낭(香囊·고려시대부터 사용한 향을 넣어 몸에 차는 주머니)을 지니거나 노리개에 향을 넣어 현대인이 향수를 뿌리듯 향을 즐겼다. 또 옷을 향기롭게 하고 옷에 좀이 먹지 않도록 여러 가지 향을 섞은 의향(衣香)을 만들어 옷장에 넣었다. 조선 후기 문신 채제공(1720~1799)이 분홍색 관복을 입고 향낭을 든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호림박물관이 꼽는 지나쳐선 안 되는 작품이다. 전시는 올해 12월 21일까지.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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