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공무원들에게 국내 기후행동에 대해 강의할 일이 있었다. 특히 자원순환 문제, 그중에서도 일회용품 줄이기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적극적인 분위기였고 특히 일회용품뿐 아니라 다회용품도 과소비되고 있다는 것을 탄소발자국으로 비교한 내용에 호응이 좋았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자조 섞인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자원순환에 진심인 훌륭한 공무원들이구나 싶어 '이제 친환경 기념품, 판촉물로 텀블러와 에코백을 뿌리는 것은 그만해야 하고, 시민들도 쓸 만한 걸 갖고 있다면 거부해야 한다!'고 나도 모르게 고무되기까지 했다.
문제는 다음 장면. 강의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감사 표시라며 선물을 건넸다. 집에 와 열어보니 아뿔싸. 선물의 정체는 큼직한 텀블러. 그 씁쓸한 웃음의 의미는 이거였구나. 성의는 진심이었을 텐데 도로 가지고 갈 수도 없고 난감했겠구나. 문득 기후행동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물 중에는 이제껏 우리가 지켜온 예의와 격식도 있는 것인가 싶었다.
몇 년 전부터 회의나 행사를 준비할 때 빠지지 않는 고민거리가 있다. 음료컵은 어떻게 하나, 현수막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음식은 몇 인분을 준비해야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을까. 별별 시도도 다 해봤다. 텀블러 지참 안내 문구도 넣고, 플라스틱천 현수막 대신 스크린으로 대체하기도 하고, 노쇼를 대비해 신청자 수보다 적게 음식을 주문하는.
그러나 대만에서 온 텀블러 선물처럼 도돌이표를 찍기 일쑤. 텀블러가 없는데 목이 너무 마르다는 참석자의 호소에 부랴부랴 생수를 공수하고, 사진 촬영하려면 현수막이 있어야 한다는 공동주최 측의 요구에 현수막이 컴백한다. 인원수 예측은 늘 실패해 한 해는 음식이 부족해 발을 동동 구르고, 다음 해는 음식이 많이 남아 비닐백을 사와 나누어 싸가느라 또 난리를 겪는다. 손품 팔아 대용량 보온통에 담긴 커피와 다회용컵 렌털 서비스를 불렀건만 함께 진열한 시중의 과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일회용 비닐포장이 되어 있는 걸 보면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기후위기 시대, 느리지만 우리가 지켜야 할 예의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 몇 년 전 스타벅스의 50주년 이벤트는 '또 다른 컵을 주는 것은 제대로 된 기념선물이 아니다'라는 시민들의 반발에 바로 사과문을 내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요즘은 환경·기후변화 시민단체가 아닌 곳의 행사에서도 '텀블러 지참' 안내를 자주 보게 된다. 다회용기는 기본에 손님들이 남는 음식을 싸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케이터링 업체를 찾기도 쉬워졌다.
오는 9월 7일 서울 강남에서 열릴 '907 기후정의행진'에도 텀블러와 손수건, 에코백을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수만 명의 시민이 모일 것이다. 그들의 손에는 폐박스나 폐현수막에 크레파스와 물감으로 직접 쓰고 그린 각양각색의 피켓이 들려있을 것이다.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는 기후정의행진의 슬로건처럼 기후위기 시대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수많은 생물종 사이 지켜야 할 예의도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