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분노, ‘캣 레이디’의 반격

입력
2024.08.2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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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미국 대선 본투표 직전 최종 여론조사 결과는 어땠을까. 대통령 부인, 국무장관, 상원의원 등 화려한 정치 경력을 자랑하는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첫 여성 대통령을 꿈꾸고 있었고, 부동산 사업가 출신의 도널드 트럼프는 정치권 경험 하나 없이 공화당 대선 후보 자리를 꿰찬 채 역전승을 노리는 상태였다. 그해 11월 6일 공개된 마지막 여론조사에서 힐러리는 트럼프보다 2~5%포인트 정도 지지율이 더 높았다.

그러나 실제 개표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정치 이단아’ 트럼프의 백악관 장악이었다. 당시 대학교 방문연구원으로 미국에 머무르던 중이라 다양한 미국인들의 대선 관련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민주당세가 아주 강했던 곳이어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힐러리 지지와 당선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흙수저, 중서부 출신, 백인 남성들을 만나면 트럼프 대통령 탄생을 자신했다.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고, 이익을 지켜줄 대통령이다.”

실제로 미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에이미 추아는 2016년 대선 후에 쓴 ‘정치적 부족주의-집단 본능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가’에서 트럼프 당선에 일조한 백인 노동자 계급과 트럼프가 취향, 감수성, 가치관 측면에서 비슷했다고 분석했다. “그들은 말하는 방식, 옷차림, 직설적인 반응, 계속 들통나는 실수, 진보 매체로부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충분히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독서량이 많지 않다고 계속해서 공격받는 것 등 트럼프의 모든 것에 대해 동일시할 수 있었다.”

여성·이민자를 비하하고, 음담패설을 했던 녹취록이 계속 공개되는데도 트럼프 지지세는 꺾이지 않았다. 백인 노동자 계급은 트럼프의 적이 곧 자신의 적이라고 느꼈다. 그 결과 여성이자 진보 엘리트의 상징이었던 힐러리 대신 트럼프에게 표를 몰아줘 미국의 역사를 바꿨다.

2020년 대선에선 백인 노동자 계급 출신 조 바이든이 대항마로 등장하며 백인들의 집단 반발, ‘화이트래시(Whitelash)’는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하지만 불만이 여전한 백인은 물론 흑인도, 무슬림도, 히스패닉도, 여성도 불안감에 시달리는 미국 분위기는 2024년 대선 판세를 좌우할 핵심 변수로 자리했다.

지난 한 달 사이 미국 정치가 다이내믹하게 요동을 치고 있다. 대체로 안정적인 양당 체제 미국 정치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트럼프의 TV토론 압승, 재선을 노리던 현직 대통령의 후보 전격 사퇴, 존재감 없던 비(非)백인·여성 부통령 카멀라 해리스의 화려한 등장, 그리고 지지율 역전 등 판세가 급변하고 있다.

석 달도 남지 않은 대선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다만 인종과 종교 갈등의 뿌리가 깊어지고, 경제와 문화 양극화도 극심해지고 있다. 여기에 여성혐오 조장까지 겹치면서 분열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게 미국 현실이다. 2016년에도 그랬듯, 경합주(州) 판세 역시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

추아 교수는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동료 미국인으로 보는 집합적인 국가 정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의 앞날은 밝지 않다. 트럼프는 ‘아이 없이 고양이나 키우는 여자들(Cat ladies)’이라는 중세 마녀사냥식 편견 가득한 40세 JD 밴스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세웠고, 상대 후보 해리스를 여성혐오와 비하의 언어를 총동원해 깎아내리고 있다. 8년 전 힐러리 같은 역전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캣 레이디’의 분노를 결집하는 해리스의 화이트래시 대응 전략 성공 여부가 관건이다.

남의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한국 사회 역시 미국 못지않게 분열과 극단으로 치닫고, 세상을 갈라치며 상대를 배제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어서다. 한국 정치의 암울한 미래를 2024년 미국 대선판에서 이미 느끼고 있다.

정상원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