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집권 자민당이 다음 달 말 차기 총재 선거를 앞두고 '비자금 스캔들 지우기'에 나선 모습이다. 해당 스캔들에 연루된 각 계파 의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이들을 자극할 만한 발언을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당 쇄신'을 외쳐야 할 때 오히려 소극적 태도만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20일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 의사를 드러낸 후보들은 대부분 '파벌 비자금' 조성 방지나 정치 개혁 관련 발언 자체를 주저하는 분위기다. 이 사안을 언급한 인사는 출마 의향을 내비친 11명 중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과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장관 정도다. 아사히는 "(비자금 스캔들과 관련해) 이시바는 '국민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고이즈미는 '새 총재가 나오면 국민이 잊어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각각 발언한 게 전부"라고 전했다.
그러나 비자금 스캔들은 자민당의 최우선 해결 과제다. 지난해 12월 당내 일부 파벌이 정치자금 모금 행사를 이용해 후원금을 유용한 사실이 드러나며 자민당은 큰 홍역을 치렀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올해 1월 '계파 해체'를 선언했지만, 미온적 대응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당 지지율은 계속 급락했고, 결국 기시다 총리는 지난 14일 총재 연임 도전을 포기했다.
그런데도 후보들은 되려 비자금 스캔들 연루 인사들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가장 먼저 총재 선거 출마 선언을 한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장관이 대표적이다. 고바야시 전 장관은 전날 기자회견에 자신을 지지하는 의원 24명과 함께 나타났는데, 이 중 7명이 비자금 스캔들 관련자였다. 지난 11일에도 그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징계가) 지나치면 정치가 돌아가지 않는다"며 이들을 두둔했다.
후보들의 소극적 대응은 '기존 아베파' 의원들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베파는 한때 소속 의원 100명에 달하는 당내 최대 계파였다. 아사히는 "선거에서 이기려면 비자금 스캔들의 중심인 아베파의 표를 받아야 하므로 그들의 반감을 사지 않으려는 것"이라며 "사태를 엄중히 보는 후보가 없다"고 일침을 놓았다.
게다가 아베파처럼 다시 파벌 중심으로 뭉치는 모습도 엿보인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지난 18일 밤 도쿄 시내에서 니카이파 사무총장을 지낸 다케다 료타 전 총무장관을 만났다. 요미우리는 "출마에 필요한 추천인 확보를 위해 니카이파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라며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기시다 총리가 이끈 기시다파의 지지를 기대하고, 아소 다로 전 총리는 아소파 소속인 고노 다로 디지털장관을 지지한다"고 전했다.
자민당 선거관리위원회는 차기 총재 선거일을 다음 달 27일로 확정했다고 이날 밝혔다. 공식 선거 운동이 시작되는 고시일이 다음 달 12일로 잡히면서 선기 기간은 역대 최장인 '15일'이 됐다. NHK방송은 "선거 기간을 늘려 비자금 스캔들로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려는 의도"라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