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0세의 젠슨 황(미국 반도체 1위 기업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은 그래픽 칩셋 설계 엔지니어 커티스 프리엠, 전자기술 전문가 크리스 말라초스키와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의 패밀리 레스토랑 '데니스'에서 엄청난 결심을 한다. 앞으로 그래픽과 비주얼 컴퓨팅의 시대가 열릴 거라는 희망을 현실화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지인으로부터 빌린 4만 달러의 창업 자본으로 벤처를 설립했다. 이후 9,266일(약 25년 4개월). 이는 엔비디아가 상장 이후 시가총액 3조 달러 고지를 넘기기 위해 걸린 시간이다. 세계 주식 중 비록 하루 동안 시가총액 1위였지만 엔비디아는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와 함께 3조 달러 클럽에 들어선 기업이 됐다. 시총 3조 달러에 이르기까지 애플은 42년 6개월 18일이, MS는 상장 이후 37년 10개월 11일이 각각 걸렸다. 엔비디아는 이들보다 그 시간이 훨씬 짧았던 셈이다. 엔비디아의 소위 그래픽처리장치(GPU)가 어떻게 세상을 움직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젠슨 황은 갈수록 정교해지는 개인용 컴퓨터(PC) 그래픽 시장에 주목했다. 다음 컴퓨팅의 물결이 그래픽 기반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1995년에는 시장이 없었지만, 그런 혁신의 물결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처럼 엔비디아는 ‘zero billion(제로 빌리언) 달러 시장'에 집중한다. 지금은 없지만 나중에 확실하게 판을 키울 수 있는 시장, 점유율 경쟁이 아닌 완전한 새로운 시장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젠슨 황 사고의 키워드가 된다. 게임 마니아인 젠슨 황은 PC 기술이 발전할수록 3차원(3D) 그래픽을 빠르게 처리하는 가속 컴퓨팅과 이를 뒷받침하는 반도체가 중요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중앙처리장치(CPU)가 모든 연산을 담당했지만 그래픽 정보가 많아지면서 GPU가 주목받을 것으로 보았다.
초기에 젠슨 황의 생각은 시장을 너무 앞서가는 측면이 있었다. 그 결과 사업은 자주 어려움에 처했다. 엔비디아는 게이머들에게만 익숙한 회사였다. 1993년 당시 반도체는 인텔이 독점하던 세상이었다. 컴퓨터의 성능을 가르는 CPU 분야에서 인텔은 소위 ‘넘사벽’이었다. 신생 업체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건 틈새시장뿐이었다. 당시 이렇다 할 주인이 없던 3D 그래픽카드 시장을 보고 젠슨 황은 승부수를 던진다. 그에 따르면 인텔은 엔비디아를 여러 차례 퇴출하려 시도했다. 젠슨 황은 인텔과 엔비디아를 ‘톰과 제리’에 비유했다. 그는 “인텔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한다. 인텔이 가까이 올 때마다 나는 칩(GPU)을 들고 도망친다”라고 말하곤 했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역전됐다.
시장의 미래를 읽는 것과 시장 판도를 바꿀 제품을 만들어 내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젠슨 황의 제품 생산은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1995년 PC용 멀티미디어 그래픽카드 ‘NV1’을 출시했다. 판매는 원활하지 않았다. 성능은 우수했으나 가격이 비쌌다. 성공적인 GPU 전략 수립에도 NV1, NV2 등에서 파산의 위기에 직면한다. 독자 기술을 고수한 탓에 엔비디아 제품은 윈도 생태계에서 호환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개발자들은 ‘듣보잡’ 회사 제품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97년 호환이 가능한 ‘NV3’를 출시하고서야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업계에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엔비디아는 1999년 최초 지포스 제품군 ‘NV10(지포스 256)’을 출시했다. ‘지포스’ 시리즈는 성능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가성비 칩’으로 불렸다. 'GPU'라는 용어는 1999년 엔비디아에서 지포스 256을 GPU로 판매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같은 해 나스닥에 상장하면서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듯했다. 물론 GPU라는 단어 자체는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을 처음 출시할 때 플레이스테이션에 탑재된 그래픽 장치의 이름을 ‘Sony GPU’라고 명명한 게 최초이다. 하지만 이는 오늘날 의미의 GPU가 아니기에 엔비디아 GPU를 최초로 보아도 무방하다. 초기의 그래픽 프로세서는 단순했기 때문에 수많은 회사가 콘솔, 데스크톱 및 기타 컴퓨터용 GPU를 만들었다. 하지만 GPU가 발전하면서 제작 난도가 높아지자 많은 기업이 시장에서 철수했다. 더 이상 도시바나 소니와 같은 일반 전자 회사에서 GPU를 만드는 것을 볼 수 없었고, ‘3dfx 인터랙티브’와 같이 GPU만 만들던 많은 회사도 파산했다. 2000년대 초반이 되자 그래픽 업계에는 두 개의 메이저 업체만 남게 됐다. 엔비디아와 ATI로, ATI는 2006년에 AMD에 인수됐다. 인텔이 2022년에 고성능 GPU 시장에 진입하며 2강 구도가 3강 구도로 바뀌었다.
이 대목에서 CPU와 GPU의 관계를 좀 더 알아보기로 한다. CPU는 PC에서 벌어지는 모든 처리 과정을 범용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설계됐다. CPU는 순차적으로 연산 처리를 하는 반면, GPU는 병렬 연산 처리가 가능하고 그 속도가 CPU에 비할 수 없이 빠르다.
1999년 12달러에 상장한 엔비디아의 주가는 엄청나게 흔들렸다.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의 여진으로 테크(Tech) 기업들은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 엔비디아 주가는 2002년 말 연초 대비 90% 폭락했다. 업계에선 기울어진 판세를 한방에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란 평가가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8년 내부적으로 칩 결함이, 밖에선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며 7월 3일 하루 만에 주가가 30% 폭락했다. 심각한 경영난은 엔비디아에 몇 번에 걸쳐 찾아왔다. 당시 소비자는 사치품으로 생각한 GPU의 수요를 줄였다. 파산 위기가 엔비디아의 목을 조르는 순간이었다. 젠슨 황은 결단을 해야만 했다. 그는 사업을 접지 않고 대신에 자신은 연봉을 1달러만 받겠다고 했다. 그렇게 줄인 돈을 좋은 인재를 영입하는 데 썼다.
이후 엔비디아는 하드웨어 혁신의 물결이 있을 때마다 완벽하게 포착하고 대응했다. 2017~2018년 비트코인 열풍으로 전 세계적으로 그래픽카드의 핵심 부품인 GPU 수요가 확대됐다. 비트코인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엔비디아의 성장은 늦었을 것이다. 당시 코인 열풍으로 채굴업체가 늘어났다. 채굴에서 필요한 게 복잡한 수학식을 빨리 푸는 GPU여서 엔비디아 칩 품절 대란이 일어났다.
젠슨 황은 정확히 산업의 수요를 파악했고 챗GPT발 생성형 인공지능(AI)에 적합한 제품 출시로 시장을 공략했다. 엔비디아의 제품이 모든 산업군의 다양한 기업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젠슨 황의 비전은 적중했다. 챗GPT 등장 이후 놀라움도 잠시, 텍스트에서 달리(DALL-E), 미드저니(Midjourney) 등의 이미지, 음성으로 진화하더니 문자 기반 영상 생성 모델 소라(Sora)까지 등장했다. 기존 게임과 디스플레이용 GPU 시장에서 성장이 정체됐던 엔비디아는 AI용 GPU 시장에서 ‘변곡점’을 찾았다. 이는 한 회사를 넘어 전 세계 산업의 시장 판도를 바꾸는 역사적 분기점이 됐다.
엔비디아의 AI용 GPU(H-100)는 없어서 못 사는 품귀 현상까지 벌어졌다. 젠슨 황은 창조적 파괴를 지속하며 모두가 부러워하는 회사로 엔비디아를 이끌었다. 엔비디아는 이제 챗GPT를 넘어 생성형 AI 시대에서 일반 대중이 체감할 만한 구체적 제품이나 서비스가 등장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AI가 거대언어모델을 학습하려면 GPU를 최대 몇 만개 단위로 주문해야 한다. 여기에 쓰이는 GPU는 사실상 엔비디아가 독점한 상태이다. 현재로서는 엔비디아의 시장지배력이 더 커질 것이란 얘기다. 물론 엔비디아에 경쟁 요인이 없는 건 아니다. 우선 구글이나 아마존, MS 같은 글로벌 빅테크의 존재가 위협적이다. 이들 모두 AI 모델 훈련을 위한 맞춤형 칩을 이미 보유했거나(구글ㆍ아마존) 개발하고(MS)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세레브라스, 삼바노바, 하바나랩스, 그래프코어 등 AI용 반도체 칩을 개발하는 신생 스타트업들도 시장에 가세하고 있다. 향후 AI 반도체 시장을 둘러싼 일대의 대전이 볼 만할 것 같다. 그사이 엔비디아는 GPU를 발전시키며 로보틱스, 신약 분야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것으로 보인다.
조원경 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