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 만에 처음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이 서울 바깥에서 전시되는 만큼 빈틈없이 준비하겠습니다."
다음 달 3일 대구 수성구에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8,003㎡ 규모로 문을 여는 대구간송미술관. 지난 22일 미술관에서 만난 전인건(53) 초대관장은 개관작으로 선보일 훈민정음 해례본과 신윤복의 미인도 등 국보·보물급 전시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개관 후 12월 1일까지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이 평생을 바쳐 수집한 동국정운, 청자상감운학문매병, 혜원전신첩, 난맹첩 등 40건 97점을 '여세동보(與世同寶)-세상 함께 보배 삼아'라는 이름으로 선보인다. 전시실 한곳에서는 한국화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길이 38m의 실감미디어가 전시되고, '간송의 방'에서는 수집가로만 알려진 간송의 유품 26건 60점이 전시된다. 수집가로서만이 아닌 예술가 학자 교육자 연구자로서 간송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간송의 맏손자인 전 관장은 문화유산 창고지기를 자처한 부친 전성우(1934~2018) 간송미술문화재단 전 이사장의 뒤를 이어 3대째 문화유산 지킴이를 자처하고 있다. 전 관장은 "말보다 행동으로 느끼고 배우는 가풍을 이어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친이 어릴 때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다 붓과 팔레트도 씻지 않고 공놀이를 다녀왔더니, 간송이 깨끗이 정리한 후 혼도 내지 않았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스스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게 하는 무언(無言)의 가르침인 셈이다. 전 관장은 대체불가토큰(NFT)과 메타버스 등 디지털 기술 활용에 관심이 많다. 그는 "30장면으로 된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NFT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4억 화소 초정밀 촬영 등 현존 최고 기술력으로 기록하는 작업이 수반된다"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문화유산을 감상하는 디지털 기술을 시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NFT 판매도 전 관장이 주도한 바 있다.
대구간송미술관은 서울의 간송미술관과는 차별화된 기능을 선보이게 된다. 1938년 서울 성북구에 '보화각'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간송미술관은 연구활동과 교육, 봄·가을 정기전에 치중하고,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형태로 건립된 대구간송미술관은 재단 소장품뿐만 아니라 국내외 다양한 콘텐츠들을 기획전과 상설전 형태로 전시하게 된다.
두 간송미술관의 관장을 겸직하게 된 그는 특히 반세기 이상 보유하고 있는 지류문화유산(전적, 회화, 고문서)의 수리복원기술과 노하우를 활용해 대구간송미술관이 '영남권 지류문화유산 수리 복원 허브'가 될 수 있도록 전문인력도 배치했다. 그는 "종이류는 다른 문화재와 달리 조명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지면 치명적"이라며 "훈민정음 해례본과 미인도도 이번 전시가 끝나면 한동안 빛이 없는 수장고에서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 관장은 "대구는 국채보상운동과 2·28민주운동 등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극복하려는 힘이 강한 곳이고 근대부터 지금까지 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도시로 간송미술관의 최적지"라며 "간송께서 추구하신 문화보국정신을 실천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