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하는 여성=수치'이던 시절, 올림픽 메달 따고 영국해협 건넌 소녀

입력
2024.08.17 11:00
15면
디즈니플러스 영화 '여인과 바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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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홍역으로 누워 있다. 밖은 소란스럽다. 부둣가 배 한 척에서 불이 났다. 수백 명이 숨졌다는 말을 소녀는 듣는다. 육지와 불과 10m 정도 떨어져 있던 배에서 일어난 참사다. 소녀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희생자 대부분이 수영을 못하는 여성들이라고 설명한다. 소녀가 홍역을 이겨내고 일어나자 어머니는 남편에게 선언한다. 딸들에게 수영을 가르치겠다고. 여성이 수영한다는 게 불경하게 여겨지던 시절, 가부장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통보다.

①타고난 재능으로 수영을 익히다

트루디(데이지 리들리)에겐 넘어야 할 산이 또 하나 있다. 홍역으로 죽다 살아난 그는 청력에 문제가 있다. 수영이 청력을 더 약화시킬 수 있다고 아버지는 우려한다. 트루디는 수영에 본능적으로 끌린다. 며칠 떼를 써 바다에서 수영을 배우게 된다. 즐거운 취미였던 수영은 곧 트루디 인생 자체가 된다.

트루디는 10대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낸다. 17세에 여성 수영 세계 기록을 8개나 보유한다. 수영 천재를 사회가 놔둘 리 없다. 트루디는 미국을 대표해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다. 계영에서는 금메달을 획득하고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따나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이다.

올림픽에서의 부진을 만회하고 싶은 마음일까. 트루디는 남성도 2명밖에 성공하지 못한 도전에 나선다. 여성 최초로 영국해협을 수영으로 횡단하려 한다.

②여성이라 해야 하거나 할 수 없는 일들

영화는 트루디의 성취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20세기 초 부조리한 상황에 놓여 있던 여성들의 삶을 불러낸다. 1920년대만 해도 여자 수영복 노출이 심하면 경찰이 단속하던 시절이다. 독일계 트루디의 아버지는 봉건적 사고에 젖어있다. 트루디와 트루디의 언니 멕(틸다 코브햄-허비)이 조신하게 지내다 자신이 점지해준 남성들과 결혼하기를 원한다. 트루디가 올림픽에 나가고, 영국해협 횡단에 도전하는 건 해서는 안 될 일에 해당한다.

아버지뿐만 아니다. 트루디의 남성 코치 자베즈 울피(크리스토퍼 에클스턴) 역시 조력자는커녕 방해꾼이다. 그는 여성의 능력을 불신하고, 트루디의 재능을 질투하며 시기한다. 영국해협의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기 이전부터 트루디가 극복하고 견뎌내야 할 일들이 숱하다.

③도전하는 자가 역사를 바꾼다

트루디는 여러 난관을 극복해낸다. 그의 동력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수영에 대한 열정 때문인지, 여성을 억압하는 세상에 대한 저항인지, 뭔가를 이뤄내고 싶다는 성취욕이 동인인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만 수영으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는 결국 남성들의 우려와 통념과 방해를 이겨내고 수영 역사에 굵은 글씨로 남는다.

뷰+포인트
미국의 전설적인 수영선수 거트루드 에덜리(1905~2003)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미국 작가 글렌 스타우트가 2009년 낸 같은 제목의 책이 밑그림이 됐다. 트루디가 여러 난관을 이겨낸 후 거센 파도에 맞서 역영하는 모습이 잔상을 오래 남긴다. 트루디의 도전은 그녀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수영을 꿈꾸는 소녀들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자신의 가족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말레피센트2’(2019)의 요아킴 뢰닝 감독이 연출했다. ‘스타워즈’ 시리즈로 유명한 데이지 리들리의 차분한 연기가 인상적이다.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평론가 89%, 시청자 97% ***한국일보 권장 지수: ★★★★ (★ 5개 만점, ☆ 반 개)


라제기 영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