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 주역 가옥이 '쓰레기 집'… 방치 끝에 사라지는 항일 영웅들 자취

입력
2024.08.1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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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에 찾아가 본 독립유공자 생가]
지자체 표식만 붙어있고 흉가·폐가로 방치
부처·지자체 회피... 고령 후손도 포기 상태


“거기 쓰레기밖에 없어. 굳이 열어보지 마.”

13일 경기 화성시의 한 농촌마을. 진흙벽과 기왓장이 다 삭아 무너진 고택에 다가가려 하자, 주민 차경락(가명·82)씨가 가로막았다. 누가 봐도 폐가인 이 집은 다름 아닌 독립운동가 차병혁(1889~1967) 선생의 생가다. 경기도청이 발급한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는 뿌연 먼지와 거미줄에 덮여 있고, 언제 무너져도 놀랍지 않을 만큼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독립투사 차병혁이 누구인가. 차 선생은 1919년 3월 타 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의 수원·화성시 일대에서 세력을 조직해 만세운동을 주동했다. 주재소(파출소)를 습격하기도 했는데, 결국 일제 치하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했다. 광복 후인 1962년 건국훈장 중 3등급 서훈인 독립장을 받았다. 유관순 윤동주 이회영 송진우 김마리아 등 쟁쟁한 유공자들과 함께 독립장 수훈자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만세길'에 방치된 독립운동가 자취

더 안타까운 점은 차 선생 생가가 '3·1운동 만세길'에 위치한 만세길 지정 코스 중 하나라는 점이다. 경기 화성시는 2019년 8억8,500만 원을 투입해 만세운동 탐방로를 마련해 역사적 가치를 기념하고 있는데, 정작 만세운동의 핵심인 차 선생의 생가는 이렇게 방치되고 있다.

내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 봤다. 고택 흙벽 대부분이 무너져 내려 안쪽 기둥이 훤히 드러났고, 지붕 부자재들도 꺾인 채 빠져나오거나 그 파편이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대청마루엔 구겨진 포대, 낡은 농기구, 배달음식 용기 같은 각종 생활용품과 폐기물들이 섞인 채 쌓여 있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려 했으나 사람 키만 한 잡초들로 안마당이 가득 차 진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사는 후손들 덕분에 차 선생이 생활했던 집 안 곳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젊은 후손들이 도시로 떠나고, 일부 후손이 노환으로 사망하며 이젠 그마저도 어렵다. 여든을 넘긴 손자 경락씨만 마지막으로 남아 힘겹게 근처를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도 몇 년 새 몸이 쇠약해지며 잡초를 손질하는 등 집 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점점 무너지는 집이 걱정된 경락씨가 보수 공사를 요청한 적이 있었단다. 그러나 시청은 사유지에 위치한 사적지라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답만 반복했다. 이에 경락씨가 차라리 시·도청에 땅을 팔아 관리를 맡기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으나, 예산 문제로 이마저도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 화성시청 관계자는 "사유지라 지자체 보수 작업에 한계가 있다"면서 "예산 문제로 매입은 어렵고, 시·도청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면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락씨는 "광복절이면 할아버님을 찾아 걸음해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집) 모양이 저래서 마음이 무겁다"고 한숨을 쉬었다.

16년 동안 정기 점검도 없다

여기만 이런 게 아니다. 차병학 생가에서 2㎞ 거리엔 수원 만세운동을 총지휘했던 차희식(1884~1938) 선생 집터가 위치해 있다. 그 역시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다. 그러나 후손이 그의 생가를 다른 이에게 팔았고, 소유주도 지역을 떠나면서 20여 년째 빈집 상태라고 한다. '독립운동가 집터'라는 푯말이 무색하게도 창문 곳곳이 깨져 있었고, 집 내부엔 직전 주인이 쓰던 그릇, 생활용품들이 그대로 널려 있었다. 5대째 이 부근에 살고 있다는 이모(70)씨는 "저대로 둘 거냐고 지자체에 여러 차례 민원을 넣었지만 제초 작업을 가끔 하러 오는 게 전부"라고 혀를 찼다.

독립운동가의 생가나 활동터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훌륭한 역사교육 현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발자취는 '만세영웅 생가'의 쇠락 사례에서 보듯이, 개발사업에 맥없이 허물어지는 수모를 겪고 있다. 독립선언문을 한글로 풀었던 이희승(1896~1989·건국훈장 독립장) 박사의 의왕시 생가도 철거되고 그 자리엔 빌라 등이 들어섰다. 민족대표 33인이었던 김완규(1876~1950·건국훈장 대통령장) 선생의 서울 종로구 집터도 표석 없이 헐렸다.

전국 독립운동가 생가 약 200곳 중 현충시설로 분류돼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곳은 47곳뿐이다. 빈집 상태로 형태가 잘 보존돼야 하고, 소유권자가 직접 국가보훈부에 신청해야 자격을 얻을 수 있는데 이마저도 정기 관리 대상은 아니다. 보훈부 관계자는 "보수 작업 신청 시 일부 금액을 지원하고, 유적 전문가 등을 대동한 정기 방문은 따로 없다"며 "관리는 지자체의 몫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실태 파악조차 2008년 진행된 전수조사 이후 없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더 적극적인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분명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산"이라며 "지정 문화재가 아닌 경우 후손들이 떠안는 경우가 많은데, 보다 적극적인 책임 주체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유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