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도 처형의 사유도 뚜렷하지 않은 시인의 죽음

입력
2024.08.1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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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스페인 시인 겸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Pederico Garcia Lorca)가 1936년 8월 19일, 알려진바 고향인 남부 그라나다의 베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극우파 경찰이 포함된 6명의 사형 집행인에 의해 재판 없이 총살당했다. 투우사와 교사 등 공화파로 낙인찍힌 2명과 함께 희생된 그는 총살되기 전 자신들이 묻힐 무덤을 직접 파야 했다는 설이 있다. 그의 무덤은 사학자와 논픽션 작가 등 다수의 추정을 근거로 여러 차례 발굴이 시도됐지만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고, 심지어 처형당한 실제 이유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로르카는 이슬람교 지배의 흔적이 짙게 남은, 또 그래서 15세기 레콩키스타 이후 가톨릭 영향력이 성하던 안달루시아 지역 토박이였다. 지주였던 아버지의 강요로 예수회 학교를 거쳐 마드리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그는 교사 어머니에게서 익힌 피아노 연주와 작곡 등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예술에 심취했고, 특히 대학 시절부터 시와 희곡 등 문학에 몰두했다. 1919년 마드리드 국립대에 진학한 뒤 한때 연인이던 화가 살바도르 달리 등 예술가들과 폭넓게 교유했고, 달리가 꾸민 무대에서 공연한 연극 등으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동성애자였다.

지주-가톨릭 중심의 억압적 전근대성을 혐오하던 그는 1936년 정교분리와 토지개혁을 앞세운 좌파 인민전선 정부를 환영했다. 하지만 그해 7월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내전이 시작됐다. 그는 고향 그라나다로 피신했지만 불과 한 달 만에 극우파 반군에 의해 체포됐다. 내전 극우파가 그를 체포-처형할 만한 이유는 그의 성정체성과 문학을 통한 집시 민족의 옹호, 공화파 동조 등 무척 많다. 하지만 그가 우파 민족주의자들과도 썩 잘 지냈던 점에 주목하는 이들은 사적인 동기, 즉 지역 토지 이권 등을 둘러싼 가문 간 알력이 주된 이유였다고 주장한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