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찾은 경기 화성시 백미리 어촌마을. ‘100미리’라고 쓰인 입간판을 지나 마주한 백미리는 작은 포구와 해안의 드넓은 갯벌, 탁 트인 바다를 품고 있었다. 물이 빠지자 어촌계 어민 예닐곱 명이 호미와 삽을 들고 갯벌에 나가 조개와 낙지를 잡기 시작했다. 어민 김모(50)씨는 “알이 굵은 백합과 모시조개가 곧잘 잡힌다”고 말했다.
마을 한쪽 3층짜리 수산물가공공장에선 대여섯 명의 어민들이 조개와 전복, 꼬막 등을 선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갓 잡은 싱싱한 수산물을 가져와 손질한 뒤 자체 개발한 양념간장을 붓고 장류로 만드는 공정이다. 마을 이름인 백미(百味)는 어장자원이 풍부해 다양한 해산물 맛을 즐길 수 있다는 뜻. 마을 이름 그대로 다양한 해산물 채취와 가공으로 백미리는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쇠락의 길을 걷는 여느 어촌마을과는 달리 백미리 마을공동사업장 곳곳에선 활기가 돌았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 위기를 겪던 백미리가 ‘젊은 부자 어촌마을’, ‘귀어인의 성지’로 옷을 갈아입는 데 성공했다. 한때 70명에 달하던 어민이 2000년 초반 50명대까지 줄면서 소멸 위기에 내몰리던 백미리가 대반전을 이뤄낸 원동력은 ‘화합’과 ‘도전’이었다. 어민 모두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목표를 향해 똘똘 뭉쳤고 신사업 발굴에 박차를 가한 게 현재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반전의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백미리를 위기에 몰아넣은 대규모 간척사업이었다. 김호연(60) 백미리 어촌계장은 “1990년대 후반 마을에서 5km가량 떨어진 바다에 시화방조제와 화옹방조제가 잇달아 들어섰다”며 “이후 조류흐름이 바뀌고, 모래톱이 깎여 나가면서 주 수입원이던 김 양식은 물론 갯벌채취도 힘들어져 어민 상당수가 생업을 잃게 될 위기에 내몰렸다”고 떠올렸다. 1,000헥타르(1,000만m²)의 공동어업구역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던 마을을 지킨 건 토박이 어민들이었다. 어민들은 2004년 새롭게 선출된 당시 40대의 젊은 김호연 어촌계장을 중심으로 힘을 모았다. 원주민 이탈로 인구 소멸, 고령화의 시계가 빨라지자, 귀어인 유치에도 뛰어들었다. 새로운 소득원 발굴을 위해 마을공동사업을 위한 기반 조성에도 박차를 가했다.
먼저 기후변화에 따른 수산 환경의 변화에 눈을 돌렸다. 주로 남해안에서 생산되던 새꼬막 양식업을 백미리 바다에 도입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듬해 10억 원대 매출을 올리면서 희망을 봤고, 이후 수년간의 도전 끝에 고부가가치 품종인 전복, 해삼 양식에도 성공했다.
수산물 확보망이 자리 잡자 유통 사업에 뛰어들었다. 2013년 유통전문업체인 ‘백미리자율관리공동체영어조합법인’을 세웠다. 어민들이 갯벌에서 잡은 모시조개, 꼬막, 낙지 등을 직거래로 판매해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해주기 위한 시도였다.
2012년 백미리로 이사와 어촌계 사무장을 맡아 공동체사업을 이끈 이창미(60)씨는 “판로가 확보되자, 어르신들도 갯벌에 나가 조개류 등을 잡아 조합에 맡겼다”며 “벌이가 늘어 손주 대학 학비를 보태는 어르신도 있었다”고 말했다.
수산업에 부가가치를 더한 6차 산업화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2008~2011년 해양수산부의 '자율관리 어업분야 선진 모범공동체'로 선정돼 받은 특별사업비 10억 원(국비 4억 원, 화성시 4억 원 등)에 자부담 8억 원을 보태 2016년 7월 마을의 숙원인 수산물가공공장(496㎡)을 지었다. 첨단 제어 시스템을 갖춘 냉동(-40℃) 냉장(-20℃) 시설과 수산물 세척기계 등을 구비하게 된 어민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한 해 생산하는 3,300톤의 바지락 등 수산물을 직접 가공해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가공공장에서 담근 꽃게장, 새우장, 돌게장, 꼬막장 등은 ‘백가지 맛 백가지 바른먹거리 바다 백미’란 마을 브랜드로 국내 주요 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 등에 입점했다. 가공공장에서만 연 30억 원 이상 매출을 올리고 있다.
어촌체험마을도 문을 열었다. 거대한 항구를 끼고 있고 먹거리촌도 발달돼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옆 마을 제부도와 궁평항 등에 비해 인지도는 떨어졌으나, 한적한 시골 어촌마을의 '풍광'에 승부를 걸었다. 천혜의 생태환경을 갖춘 갯골수로(바닷물과 육지가 맞닿은 곳)에 도입한 망둥어 낚시 체험이 소위 대박이 나면서 ‘서해안 낚시 명소’로 떠올랐다. 갯벌에 말뚝을 박고 그물을 걸어 물고기를 잡는 백미리의 전통 어업 방식인 ‘건강망’ 등의 체험도 인기를 끌었다. 갯벌마차, 카약 레이싱 등 이색 체험장에도 체험객이 몰렸다.
체험프로그램에 B&B하우스(식당·카페, 숙박시설)에서 어민들이 손수 제공해주는 특별식 등이 인기를 끌면서 백미리는 단숨에 한 해 15만 명이 찾는 ‘해양생태휴양마을’로 발돋움했다. 코로나19 이전엔 전국 어촌체험마을 중 한 해 매출(20억 원) 1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백미리의 성공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2004년대 2억여 원에 불과하던 마을 공동체사업 소득은 2015년 35억 원으로 급증했고 지난해 100억 원을 돌파하며 20년 새 50배의 성장을 이뤘다. 백미리 어촌계에 따르면 이 마을의 공동체 소득은 2004년 전국 2,200개 어촌계 중 2,100위였으나, 지난해 10위로 뛰어올랐다. 해양수산부는 백미리의 기적과도 같았던 성공 사례에 주목, 2019년 전국 지자체 및 어촌계 지도자 200명을 모아 백미리 마을 견학을 시켰다.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워졌어요. 만족합니다.”
2016년 경기 수원에서 학원을 운영하다 그해 봄 백미리로 짐을 싸 귀어한 최중순(57)씨는 “처음엔 새벽 갯벌채취 등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는데 지금은 베테랑 어민이 됐다”고 흡족해했다. 최씨는 갯벌 어업에 마을공동사업인 꼬막양식 등에 참여하면서 연간 억대 가까운 수입을 올리고 있다. 도시 생활과 비교하면 수입이 배 이상 늘었다. 시간적 여유도 많아져 삶의 질도 높아졌다고 했다. 백미리에선 최씨처럼 억대 수준의 수입을 가져가는 어민이 적지 않다고 한다. 기존 어민과의 갈등은 없었다. 김호연 어촌계장은 “마을의 공동체 수입을 늘리면서 일한 만큼 공정하게 나누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며 “룰대로 하니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백미리의 기적과도 같은 성공엔 귀어인의 힘이 컸다. 백미리의 귀어인 유치 노력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을은 어촌계원이 50여명에 불과했고, 평균 연령도 75세에 달해 쇠락하고 노쇠했다. 소멸위기에 직면하자 김 어촌계장은 어민들을 설득, 1가구에 1명만 가입할 수 있게 제한한 어촌계 가입정관을 바꿔 마을의 20~30대 청년 20여 명을 영입했다. 외부인의 어촌계 가입문턱도 대폭 낮췄다. 마을 내 토지 소유, 거주기간 등 까다로운 조건도 없애 버렸다. 귀어인을 한정된 어촌마을의 수입을 나눠줘야 할 대상이 아닌 삶의 동반자로 인식을 바꾸는 데 힘썼다. 낯선 환경에 놓인 귀어인에게 손을 내밀어 맨손어업부터 공동체 사업까지 기술을 전수해주며 자립을 돕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가 퍼지자, 어촌 특유의 텃새도 사라졌다.
백미리가 전국적으로 모범이 되는 귀어인 성지로 떠오르게 된 배경이다. 2000년 초반 55명으로 시작했던 어촌계원은 지금은 배가 넘는 124명으로 늘었다. 이 중 절반은 귀어인이다. 20대 청년 귀어인도 5명이나 있다. 평균 연령 역시 예전 75세에 지금은 49세로 젊어졌다. 어민이 늘면서 백미리 전체 마을 주민도 2002년 134가구(315명)에서 지난달 기준 236가구(461명)로 늘었다.
화성시의 재정지원도 뒷받침이 됐다. 시는 백미리를 비롯해 관내 4곳의 어항·어촌에 대해 어업인·귀어인 지원사업을 펼쳐왔다. 청년(18~39세) 귀어인에 대해선 3년간 월 최대 110만 원의 어업경영비를 지원해주는 ‘청년어촌정착 지원사업’도 진행했다. 올해부터는 어업을 희망하는 도시민에게 어업, 양식업 등 기술을 알려주고 임시주택 2곳도 제공해주고 있다.
정명근 화성시장은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연구에 따르면, 2045년엔 전국 300여 개 어촌·어항 마을의 87%가 소멸 고위험 지역으로 내몰릴 것이란 경고가 있다”며 “어촌의 새로운 희망을 연 백미리 주민들의 소득 증진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필요한 행정·재정적 지원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