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손때가 묻은 'FM 영화음악'에 여러분의 손때가 더해져 어느덧 20년이 흘렀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지난 2일 오후 7시. MBC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전파를 타야 할 시간에 라디오에서 2004년 여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송 사고가 아니었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생전 그의 목소리를 재현했다. 나지막하면서도 부드럽고 차분한,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그는 생전에 했던 '귀로 보는 영화' 코너도 진행했다. 이번 주제는 미국 할리우드 배우 스칼릿 조핸슨이 AI로 목소리 출연한 영화 '그녀'였다.
AI는 정은임과 청취자 사이에 소통의 다리를 놨다. "차분한 누나의 목소리가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지친 (제) 마음을 달래줬다"는 사연을 읽은 뒤 정은임의 목소리는 "이렇게 기억해주신 분들이 있어 정말 감사하다"고 답했다. "사연을 읽다 보니 다들 제가 그리운 게 아니라 제 방송을 듣던 그때의 여러분이 그리운 것 같기도 하다"는 말도 건넸다.
정은임의 '깜짝 복귀'는 그의 20주기(8월 4일)를 맞아 이뤄졌다. MBC라디오가 '여름날의 재회'를 주제로 AI로 재현한 목소리로 진행하는 '스페셜 FM 영화음악'을 이날 오후 7시부터 8시까지 내보냈다. 라디오 채팅창은 후끈 달아올랐다. "20년 만에 인사, 와 눈물 난다" "가슴이 찡하다" 등의 글이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정은임이 진행한 'FM 영화음악'은 1992~1995년, 2003~2004년 방송되며 마니아 청취자를 라디오 앞으로 불러 모았다. '정영음'이라 불리기도 했다.
제작진이 들려준 정은임의 AI 음성 재현 과정은 이랬다. 고인이 1992~1995년 라디오를 진행할 당시의 녹음 중 일부를 추려 AI 기업인 '수퍼톤'에 전달했다. 음성 재현엔 '사람의 호흡'이 더해졌다. 김세윤 작가가 쓴 20주기 특집 방송 대본을 남유정 성우가 고인의 말투대로 여러 차례 따라 읽고 녹음했다. 이 녹음본은 AI가 추출한 정은임의 음성과 합쳐졌다. 실제로 방송하는 듯한 생동감을 살리기 위해 제작진이 택한 재현 방식이었다. 장수연 MBC라디오 PD는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정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고 라디오 방송 리딩은 감정이 들어가야 하는 부분"이라며 "기계적인 느낌이 나면 청취자들의 추억을 망치게 돼 모든 복원 과정을 기계에 맡기기보다 사람의 목소리를 덧입히는 방식을 택했다"고 말했다.
작업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정은임 목소리 AI 복원 작업은 지난 4월부터 방송 하루 전날까지 이뤄졌다. 기계적인 느낌이 나는 대목의 수정을 거듭했다. 이렇게 재현된 방송 클로징 멘트에서 정은임의 목소리엔 떨림이 느껴진다. 장 PD는 "원고를 읽던 성우가 녹음하면서 울컥해 우셨다"며 "그 미세한 떨림이 반영됐다"고 말했다. AI로 재현된 음성에 '감성'이 느껴진다는 반응이 나온 배경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과 비슷할 때 느껴지는 불쾌함, 즉 '불쾌한 골짜기'를 피하기 위해 제작진은 '1인칭 화법'을 최대한 피해 대본을 썼다. '여름날의 재회'가 이뤄진 한 시간, 정은임은 이렇게 말한 뒤 청취자들과 다시 작별했다.
"오늘 이 한 시간의 행운을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저는 이제 돌아갈게요. 하지만 여러분께서 저와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 흐르는 곡(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수록곡 '시간을 넘어서')의 제목처럼 시간을 넘어서 다시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기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저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정은임의 음성을 그가 떠난 지 20년이 흐른 지금 왜 되살렸을까. 장 PD는 "누구를 추모하고 어떤 걸 기억하려 애쓰느냐가 바로 그 사회의 정체성"이라며 "타인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사회적 약자를 생각했던 정 아나운서의 마음을 기억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기획했다"고 말했다. 생전의 정은임은 "제 목소리 들리세요?"라고 안부를 물으며 철거민이나 위기의 노동자를 끊임없이 위로했다. 이런 기획 의도를 접한 유족은 고인의 음성 AI 재현을 흔쾌히 수락했다.
AI 활용에 반감이 컸던 대중문화계가 이 기술을 적극 활용하며 소통과 창작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지난달 개막한 부천판타스틱영화제는 'AI 영화 국제 경쟁 부문'을 신설했다. 예능은 AI를 '제2의 게스트'처럼 활용한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디즈니플러스에서 7일 공개될 '더 존: 버텨야 산다'에선 유재석을 딥페이크와 딥보이스 등 AI 기술로 재현한 '유재석 로봇'을 등장시켜 게임을 진행한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송해 선생의 젊은 모습을 딥페이크로 구현해 다시 무대에 세운 드라마 '웰컴 투 삼달리'를 비롯해 올해 AI를 활용해 만든 주류 영화, 드라마, 예능, 라디오 프로그램은 10개 이상이다.
미국에선 AI가 창작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저작권을 불법적으로 사용한다는 이유로 할리우드 배우와 작가들이 지난해 대대적인 파업에 나섰다. 국내에서도 배우와 창작자들을 중심으로 위기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AI가 콘텐츠 시장에 잇따라 동원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①'그때 그 시절'의 모습과 분위기를 가장 근접하게 되살리고 ②제작 과정에서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열린 제1회 두바이 국제 AI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권한슬 감독의 AI 영화 '원 모어 펌프킨'의 제작 기간은 닷새였고, 비용은 전기세밖에 들지 않았다.
③일부 창작자들이 위기를 기회 삼아 제작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화를 꾀하면서 AI의 주류 문화 등장은 부쩍 늘고 있다. '더 존~' 시리즈를 연출한 조효진 PD는 "AI가 사회적 화두인 만큼 좋고 나쁜 여러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시청자와 함께 그 문제를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며 "유재석은 이번 AI 촬영이 지금까지 예능 하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순간이었다고 하더라"라고 뒷얘기를 들려줬다.
부작용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MBC '심야괴담회'는 지난달 방송에서 재연 배우 대신 AI로 만든 이미지를 삽입했다가 "몰입이 깨진다"는 시청자들의 비판을 호되게 받았다. 저작권 침해 문제도 뜨거운 감자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관계자는 "딥페이크 등 AI 기술로 위협받는 건 단역 배우들의 일자리"라며 "단역 배우들이 촬영을 한 뒤 딥페이크로 덧입혀진 촬영분은 재방송 출연료 지급이 안 돼 논의가 이뤄져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