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야스쿠니 신사 맞은편에서 약 500m 떨어진 7층짜리 건물. 일본 정부가 1999년 세운 '쇼와관(昭和館)'이다. 쇼와는 히로히토 일왕의 연호로 그가 재임한 1926~1989년을 칭한다. 이 중 전중, 전후 시기 일본 국민들의 힘들었던 생활상을 후손에게 알리기 위해 쇼와관이 건립됐다. 지금까지 67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6월 25일 쇼와관 7층에 들어서자 '가족과의 이별'이라는 팻말이 눈에 띄었다. 전시장에는 출정을 응원하는 문구와 함께 욱일승천기가 걸려 있었다. 출정 날 욱일기를 들며 전쟁터로 나가는 아버지를 배웅하는 가족들의 사진과 충성을 다해 조국의 은혜를 갚는다는 뜻의 '진충보국'이 쓰인 일장기도 보였다. 가족과 이별하는 군인들의 심정을 담은 편지도 있었다.
전시장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강조하는 글이 가득했다. '통제하의 생활'이라는 안내판 아래에는 중일전쟁 후 징용령과 금속회수령이 내려져 가정 내 철 등이 공출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미군의 전투기 사진과 함께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을 비롯해 1919년 말부터는 본격화된 공습에 많은 도시가 피해를 봤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대형 공습피해 지도는 미군의 폭격에 의해 사망한 사망자 숫자를 지역별로 일의 자리까지 자세히 안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시장 어디에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원인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항복선언이 있던 패전 날은 '쇼와 20년 8월 15일'이라는 제목 아래 당시 일왕이 낭독한 선언문과 당일 신문지면이 전시돼 있을 뿐이었다. 중일전쟁에 대해선 일본군과 중국군이 충돌했다는 식의 짧은 글이 전부였다. 전쟁 발발 원인은 지운 채 미군의 공습으로 인한 경찰서의 소실, 공습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의 배급 물자 지원을 위한 서류 등 피해 상황만 가득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한 외국인 피해에 대한 언급도 일절 없었다. 외려 '전쟁 후 외지로부터 약 650만 명의 사람이 일본으로 돌아와 물자 공급이 더 어려워졌다'는 식으로만 기술됐다. 한반도에서 1945년 찍힌 배의 사진설명에는 일본인들을 싣고 돌아왔다는 서술만 있고 함께 탄 조선인들의 귀환은 담겨 있지 않았다.
반면 전 세계에 퍼진 일본인의 피해는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 국가별·지역별 전몰자 수와 함께 유골 송환 작업 과정이 빽빽하게 지도를 채웠다. 소련 등 지역에 억류된 포로들의 편지도 눈에 띄었다. 심지어 구소련 지역의 전몰자 위령비를 건립한 사례도 적혀 있었다. 최근 강제동원 추모자들의 위령비를 강제로 철거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움직임과 아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역사학 전공자인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는 쇼와관에 대해 "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배제한 채 일본의 전쟁 피해만 부각하고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해선 애매하게 처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전시관엔 전후 폐허를 극복하고 근대화를 일군 자화자찬에 가까운 내용만 나열돼 있었다.
도쿄에 자리한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상황도 비슷했다. 일본은 2015년 군함도(端島·일본명 하시마 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조선인 강제노동 역사를 알리겠다고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않다가 2020년에야 이 센터를 만들었다. 유산 소재지도 아닌 도쿄에, 그것도 유동인구가 거의 없는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탓에 문을 열었을 때부터 시늉만 낸다는 논란이 있었다. 실제로 방문해보니 센터는 건립 취지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전시장 내부는 사진 촬영도 녹음도 금지될 만큼 폐쇄적이었는데 비서구 국가인 일본이 50년 만에 산업화를 이룬 데 대한 자부심만 곳곳에 묻어났다. 해설자는 타국의 식민지배 없이 산업혁명에 성공했다며 군함도의 성공 스토리와 창업자 얘기를 1시간 넘게 설명했다. 근대화를 이룬 유학생 들의 사진엔 조선 식민 통치를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영국 런던대학교에서 유학)도 있었다.
이들은 또한 강제동원 사실을 부정하고 조선인과 일본인 간 차별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태평양전쟁을 위해 군함도에서 조선인들을 강제로 노동시켜 착취했다는 내용은 쏙 빠졌다. 오히려 군함도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차별은 없었다"는 해명이 줄을 이었다. 특히 당시 조선인의 월급봉투와 공무원의 월급을 1원 단위까지 상세하게 비교해 조선인이 더 많은 월급을 받았다고 역설했다.
심지어 '누가 역사를 조작하고 있는가? 군함도는 지옥도가 아닙니다'라는 소책자를 한국어판으로도 만들어 배포하고 있었다. 소책자엔 한국 언론에 실린 강제동원 증언들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내용이 담겼다. 2015년 군함도 등재 당시 일본 정부가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고 말한 것을 후회하는 취지의 문구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일본 사회에 이 같은 역사 부정이 자리 잡은 배경에 1990년대 우파들의 움직임이 있다고 진단한다. 오가타 요시히로 후쿠오카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교수는 "일본에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 식민지에 대한 반성, 전후 보상문제 등에 대해 주목도가 가장 높았고 당시 교과서 대부분엔 피해 사실에 대한 얘기가 담겨 있었다"며 "그때 반대로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거품 경제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이 가파른 경제성장을 이루자 일본 사회 전반에 위기감이 조성됐다. 이에 자학사관에서 벗어나 부강한 일본을 바라보고 싶어 하는 우파의 주장이 힘을 얻기 쉬운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시기 이른바 '보통국가론'이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군대 보유가 금지된 평화헌법을 부정하고 비정상적 상태를 정상화하자는 주장이다. 자위대 해외 파병 금지로 2006년 이라크 전쟁 당시 파병이 불가능해지자 자국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국민이 많아지면서 일본의 보수화나 역사 왜곡을 가속화했다는 해석도 있다. 우경화의 사상이나 이론이 몸에 배어있는 세대가 나타난 것이다. 오가타 교수는 "우파뿐만 아니라 중도 세력, 보수 성향이 강한 일반 사람 중에서도 일본의 가해역사보다는 일본이 발전했던 근대화 측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돌아봤다.
일본에 배상과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의 태도를 과도한 민족주의로 인식하고 거부감을 갖는 중도층이 늘었다는 시각도 있다. 한국을 혐오하면서 반한을 주창하는 이들은 물론 옳지 않지만 줄기차게 사과를 촉구하는 한국도 잘못됐다는 양비론이다. 정 교수는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및 일왕에 대한 사과 요구, 2011년 8월 위안부 할머니 문제에 대한 국가의 부작위(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음)는 위헌이란 헌법재판소 결정 등 한일 관계 악화의 계기가 된 사건들에 대해 한국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오지만 일본에서는 하나의 '반일(反日) 내셔널리즘'으로 비춰지는 측면이 있다"며 "일본의 소위 양심적 정치인들도 한국과 선뜻 연대하기 어려워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우경화하는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 교수는 "역사적 사실이나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자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민을 기르는 게 교육의 목표인데 일본 정부가 역사 왜곡과 부정을 교과서에 반영하려 하면서 정부 견해와 자신의 생각을 동일시하는 권위주의적인 사고가 굳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