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이후 최대’ 서방·러시아 수감자 교환 막전 막후... 나발니는 살려오지 못했다

입력
2024.08.03 04:30
8면
협상 대상 포함됐다가 옥중 돌연사
바이든, 사퇴 선언 직전까지 설득전
“푸틴 ‘인질 외교’에 당했다” 지적도

미국 등 서방과 러시아 간 '냉전 이후 최대 규모' 수감자 교환이 성사됐다. 러시아 감옥에 갇혔던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와 독일에서 복역하던 러시아 암살자를 주고받는 것이 거래의 핵심이었다. 서방 각국의 자국민 석방은 성과라는 평가도 있지만 러시아의 '인질외교'에 또 당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서방 8명 보내고, 러시아 16명 풀어줘

1일 오후 11시 40분쯤(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착륙한 항공기에서 미 해병대 출신인 폴 휠런과 WSJ 기자 에반 게르시코비치, 자유유럽방송(RFE) 기자 알수 쿠르마셰바가 차례로 내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이들의 가족과 함께 마중했다. 이들은 몇 년간 러시아에 수감돼 있다가 이날 튀르키예에서 석방돼 고국행 비행기를 탔다.

백악관은 이날 미국 등 서방과 러시아가 수감자 24명을 맞바꿨다고 밝혔다. 러시아에서 풀려난 서방 수감자가 게르시코비치 등 16명이었고, 서방이 러시아로 돌려보낸 수감자는 8명이었다. 서방의 경우 미국이 3명, 슬로베니아가 2명, 독일·노르웨이·폴란드가 1명씩의 러시아 죄수를 송환했다. 러시아가 놓아준 자국민 대부분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알렉세이 나발니와 연관된 인물들이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날 사전 브리핑에서 “냉전 이래 이렇게 큰 규모, 복잡한 방식의 교환이 이뤄진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연설을 통해 “3명의 미국인은 모두 부당하게 간첩 혐의를 적용받았다”며 “이번 석방은 동맹들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에게 감사했다.

“바이든 아니면 불가능했을 일”

사전 브리핑에서는 협상 막전 막후가 소개됐다. 이번 교환 거래의 중심에 놓인 인물은 독일에서 수감 중이던 러시아 정보기관 연방보안국(FSB) 암살 요원 출신 바딤 크라시코프였다. 그는 2019년 독일에서 조지아 출신 전 체첸 반군 지도자를 살해한 뒤 2021년 종신형을 선고받아 갇혀 있었다. 푸틴 대통령이 그의 석방을 강하게 원했다.

독일은 난색을 보였다. 선례가 생기면 러시아 등 독재국이 거래 카드를 만들기 위해 서방 인사들을 더 많이 구금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게르시코비치 석방이었다. 나발니 정도 거물을 교환 대상에 넣으면 독일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 믿었고, 예상은 적중했다.

위기는 러시아와 석방 협의를 개시하자마자 닥쳤다. 2월 중순 나발니가 옥중에서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설리번 보좌관은 “나발니를 포함한 거래를 성사시키려 파트너들과 협조했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숨졌다”고 말했다.

협상이 난항을 겪었을 때 큰 역할을 한 이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유력한 해리스 부통령이었다. 2월 독일 뮌헨 안보회의에서 그가 숄츠 총리를 만나 논의를 진전시켰다고 설리번 보좌관은 설명했다.

마무리는 바이든 대통령 몫이었다. 지난달 21일 재선 도전 포기 선언 1시간 전에도 슬로베니아 정상을 전화로 설득하며 최종 합의를 조율했다고 행정부 고위 당국자가 전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기자회견에서 “늘 바이든 대통령에게는 시련을 견디고 있는 가족이 우선이었다”며 “이번 교환은 바이든처럼 노련한 지도자만 이룰 수 있는 외교 업적”이라고 치켜세웠다.

트럼프 “돈 준 것 아니냐”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성과를 헐뜯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나는 여러 인질을 돌려받았고 상대국에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고 썼다. 자기였다면 대가 없이 거래했을 것이라는 취지다. 이에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왜 자신이 대통령이었을 때 그렇게 하지 않았냐”고 반문했다.

평가가 호평 일색은 아니다. 줄리언 즐라이저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정치사)는 미 워싱턴포스트에 “레임덕(임기 말 지도력 공백) 시기에 역사에 기록될 만한 성공을 거뒀다”고 말했다. 반면 대니얼 길버트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정치학)는 미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번 교환을 푸틴 대통령이 선호하는 ‘인질 외교’로 규정하며 “이런 관행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김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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