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이었던 저희가 정년이 보장된 공기업에서 일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주 6일 청소하는 일을 남들은 힘들고 하찮게 여길지 몰라도, 그저 신나요. 덕분에 조그만 집도 마련했고요. 다른 노숙인 한 명이라도 입사해 저희와 일하며 새 삶을 살면 좋겠어요."
코레일의 자회사 코레일테크의 직원인 고모(44)씨와 이모(53)씨는 서울 지하철역에서 환경미화 업무를 한다. 고씨는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이씨는 밤 10시부터 다음 날 새벽 6시까지 승강장 화장실 계단 출구 등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게 임무. 승객들의 토사물, 오물을 남들이 보기 전에 깔끔하게 치운다. 지독한 냄새에 일하다 속을 게워내는 동료도 있었지만, 이들은 군말 없이 처리한다. 무기계약직인 이들이 매달 손에 쥐는 급여는 180만~190만 원. 최저임금 수준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거리를 전전했던 것을 생각하면 '인생역전'이나 다름없다.
이들의 재기는 2012년부터 서울시가 운영 중인 '청소사업단'(6개월 한시 자활 사업) 덕택이다. 사업단 참여 노숙인 중 근면성실하고 자립 의지가 확실한 소수를 시가 추천하면, 코레일테크의 정식 선발과정(서류·체력시험·면접 등)을 거쳐 청소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 청소사업단에 참여한 노숙인 643명 중 고씨와 이씨 포함 단 23명만 코레일데크에 재취업했다.
IMF외환위기와 글로벌금융위기 때 나락으로 떨어져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었던 이들은 서울시가 제공하는 최소한의 보호망 안에서 성실히 살며, 버팀목이 되어준 지인들 덕분에 공기업에 취업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이들은 "아침에 눈뜨면 출근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다"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아 아쉬울 뿐"이라고 말했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립해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라는, 흔하지만 어쩌면 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명제를 증명해 보인 인생역정을 들어봤다.
고씨는 6세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형제(2남 2녀)가 뿔뿔이 흩어졌다. 작은아버지 댁에서 얹혀살다 중학교 3학년 때 서울의 기숙형 직업전문학교에서 기술을 배운 그는 1996년 취업해 자립을 꿈꿨다. 그러나 이듬해 IMF가 터지면서 꿈은 산산조각 났다. "회사가 대우자동차 하청업체 중 한 곳이었어요. 공장 기숙사에 살다 98년 4월 거리로 나왔죠."
당시 서울역과 영등포역 등에서 노숙하다 노숙인 임시 보호시설을 들락날락했다. 그는 "시설에 머물 때는 공공근로 등을 하며 돈을 조금 모았지만, 2년이 되면 퇴소해야 했다"며 "고시원과 여인숙을 전전하다 모아둔 돈이 떨어지면 다시 시설에 입소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 어느 해 봄 '염전노예'로 끌려갔다 가까스로 탈출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공원 벤치에 누워있는데 누군가 차에서 내려 제 얼굴을 발로 밟아버리고 정신 못 차릴 때 2명이 팔·다리 잡고 차에 실었다. 정신 차리니까 목포였다. 무허가 직업소개소에서 법적 문제 안 생기게 근로계약서에 사인하도록 했다. 배편 살 돈이 없고 마을 주민이 다 한통속이어서 빠져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 해 염전 일이 마무리된 그해 겨울 주인이 목포로 잠깐 데리고 나왔을 때를 틈타 무작정 택시 타고 도망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씨는 기초생활수급 혜택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노숙인 보호시설에 있을 때 직원들이 안내했지만, 주거지원도 받고 공공근로 하면서 먹고살면 돼 굳이 필요성을 못 느껴 신청하지 않았다"며 "그 돈 받아 술 먹고 알코올중독 되는 분들 보고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고 했다.
코로나19 초창기였던 2020년 3월 기회가 찾아왔다. 코레일테크에서 서울시 노숙인 지원기관에 "자립의지가 있는 분을 추천하면, 기간제로 채용하겠다"고 했던 것. 평소 성실히 생활해 온 고씨도 추천 받아, 일반인 포함 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유일하게 합격했다. 지하철역에서 성실하게 청소를 한 그는 12월 공무직에 도전했다 한 차례 낙방 후 2021년 6월 재도전해 합격했다. 그는 "1차(서류) 통과 후 2차 체력시험에서 윗몸 일으키기, 쌀가마 들고 달리기 등을 테스트하는데, 허리디스크가 있어 떨어졌다"며 "체력을 길러 붙었다"고 했다.
7월 1일 첫 출근한 날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는 "하루 벌어 하루 살던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한 달만 버티자'고 한 게 벌써 3년이 넘었다"며 "복지 차원인 공공일자리와 달리, 회사와 계약해 많든 적든 임금을 받은 만큼 일해야 하니까 책임감이 생겼다"고 했다. 규칙적인 생활 덕에 삶이 안정됐고, 돈도 모였다. 30대 초반에 2금융권서 한 푼 두 푼 빌린 원리금 1,000만 원을 지난해 4월 다 갚고, 같은 해 5월 보증금 300만 원 월세 30만 원인 원룸도 마련했다. 자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명의로 계약한 집은 처음이었다.
이씨의 노숙 생활은 글로벌금융위기가 강타했던 2008년 신용불량자 '딱지'가 붙으면서 시작됐다. 기업과 구직자를 연결해주는 인력 파견업체를 운영했던 그는 계약을 맺고 인력을 공급하던 가구공장의 사장이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져 공장 가동이 멈추자, 직원들에게 급여를 줄 수 없게 됐다. 고용노동청을 통해 겨우 직원들의 밀린 월급 일부는 받아줬지만 그는 정작 빈털터리가 됐다. 외려 생활비가 부족해 진 빚이 불어나면서 재산이 압류됐고, 신용불량자가 돼 거리로 내몰렸다.
라면 한 그릇 사 먹을 돈이 없었던 이씨는 서울과 인천 등 건설현장을 전전하며 연명했다. 그렇게 10년 넘도록 일해도 돈은 모이지 않았고, 나이가 들어 일은 점점 힘에 부쳤다.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커져 공사판을 떠났다. 이후 야구장에서 청소일을 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씨를 눈여겨본 서울시 노숙인보호시설 옹달샘 관계자가 2019년 서울시와 코레일테크의 노숙인 자활사업인 '청소사업단' 지원을 권유했다. 그해 9월 부푼 마음으로 지원서를 냈지만 그도 체력시험에서 탈락했다. 오기가 생긴 이씨는 두 달 뒤 다시 지원했고, 재수 끝에 합격했다.
일주일에 6일, 밤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근무해도 힘들지 않았다.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자는 취객을 깨워 역무원에게 인계하고, 승객이 놓고 간 물건을 찾아주고, 역사에서 길을 잃은 노인을 안내할 때는 보람도 느꼈다.
무엇보다 적지만 정기적인 수입이 생겨 안정적 생활이 가능해진 게 좋았다. 같은 처지였던 동료와 직장 인근 작은 방을 얻어, 집밥을 해 먹는 재미도 느꼈다. 이씨는 "이제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되고, 가끔 지인들과 식당에서 모여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다"며 "규칙적이고 평범한 삶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매달 적금과 연금보험을 들고, 노후를 생각할 여유도 생겼다. 이씨는 "정년을 생각하면 일할 시간이 12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며 "퇴직 후 동료들과 함께 건물이나 공공기관 청소를 하는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라는 명제를 몸소 증명한 이들에게는 아직 숙제가 있다. 각종 지원금에 의존하는 노숙인 지인을 한 명이라도 입사시켜 함께 일하는 것. 이들은 "지인들에게 '생각을 바꾸면 큰돈 못 벌어도 남들한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살 수 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냐'고 조언한다"고 했다. 아쉽게도 그의 말을 듣고 실천한 사람이 아직 없지만, 만날 때마다 조언한다.
일반인들에게도 "노숙인은 모두 게으르고, 알코올중독에 더럽다고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노숙할 때 봉사동아리 대학생으로 만나 지금은 각각 사회복지사와 목회자가 된 친구 2명이 '처음 봤을 때부터 친구라고 생각했지 노숙자라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다. 지금도 친구니까 만난다'고 했다. 인격체로 대해주며 응원해준 친구들 덕분에 '대포통장 만들고, 다른 노숙인도 데려오면 돈 주겠다' 등 갖은 유혹도 뿌리쳤다."(고씨)
이씨도 "기초수급에만 의존하면 자립할 수가 없으니까, 젊은 친구들에게는 '여기서 일하라'고 권유한다"며 "내가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저도 이제는 돕고 싶다"고 했다. 그의 통화연결음은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가사가 담긴 서영은의 '혼자가 아닌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