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나눠야 하는 겁니다. 권력을 독식하려면 왜 민주주의 합니까. 민주정의 핵심은 권력을 나누어 행사하라는 거예요. 지금 한국 정치의 모든 문제는 권력을 나누지 않는 데서 생기는 겁니다. '권력 나눠 먹기' '정치공학' 같은 말을 조롱하듯 쓰면 안 됩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권력 나누기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두 손은 꽉 움켜쥐었고 목소리는 굵어졌다. 통합정치, 연합정치, 대연정 다 좋은데 선거를 통해 애써 얻은 권력을 왜 나눠야 하느냐, 책임정치에 어긋나는 거 아니냐는 반론이 있다 했을 때였다. 지금 한국 정치가 이렇게 된 걸 보고도 모르겠느냐는, 반문이었다.
제헌절인 17일을 하루 앞둔 16일, 20년 넘게 개헌을 주장해오고 있는 정치학자 박명림(61) 연세대 교수를 만났다. 그는 개헌을 통해 권력구조와 선거제를 바꾸지 않는 이상 '심리적 내전' 상태에 준하는 정치적 양극화는 필연적이며, 대한민국 앞날에 엄청난 걸림돌이 될 것이라 주장해왔다.
진짜 그 때문일까, 긴가민가하는 사이 한국 정치는 대통령이 검찰 수사로 야당 대표를, 야당은 탄핵으로 대통령을 겨냥하는 단계로 치달아 버렸다. 여당은 '읽씹' 논쟁에 야당은 '수박' 싸움에 날을 지새운다. 이걸 별 도리 없이 3년이나 더 봐야 한다? 3년 뒤엔 나아지기라도 하는 걸까. 진절머리 난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프랑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황제냐, 감옥이냐'에다 한국 정치를 빗댄 바 있다. 이런 양극화, 대통령이 문제인가 대통령제가 문제인가.
"굳이 말하자면 원인은 제도이고 결과가 사람이다. '황제냐 감옥이냐' 그 질문이 싫어서 민주정을 했는데 지금은 '대권이냐 감옥이냐'가 됐다. 간단히 말하면 나라를 둘로 쪼개는 게 양극주의자들에겐 유리하다. 도널드 트럼프가 양극화의 산물이면서 원인제공자이면서 수혜자이듯, 한국의 양극주의자들 역시 패배한다 해도 권력만 없다 뿐이지 자기 진영의 지지를 받고, 국회의원으로서 특권을 누리며, 지지자들의 열광적인 팬덤을 동원하는 데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때까지만 해도 연합정치에 대한 이해가 컸고, 권력을 나눠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어느 쪽 할 것 없이 놀랍도록 파당적이다. 오직 너 죽고 나 살자는 사법주의 뿐이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이 연합정치의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문재인 정부 때 탄핵연대가 연합정치를 되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박근혜 탄핵 찬성 여론이 80%였고, 국회에서도 찬성 234표로 80% 정도 나왔다. 민심과 의회가 일치한 것이다. 민주당으로선 100표 정도 더 얻어 탄핵에 성공했고, 그 결과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다. 그러니 이 100표를 연정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검찰하고 연정해서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탄핵연대를 스스로 해체해버렸다."
-적폐청산에 대한 반대는 정의감 측면에서 반하지 않는가.
"절반만 맞다. 적폐청산이 아니라 적폐극복을 해야 했다. 문재인 정부에 내가 되묻고 싶은 건 적폐청산으로 무엇을 이뤘느냐다. 국민들의 여러 삶의 문제에 대해 실질적으로 이뤄낸 게 무엇인가다. 북핵, 자살, 인구위기, 복지, 기후, 환경 등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제기되는 온갖 이슈에 대해 문재인 정부 전후로 개선된 게 뭐가 있는 지 냉정하게 되돌아 봐야 한다. 탄핵연대를 이어갔으면 적폐극복에도 성공하고, 검찰집권도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연정을 통해 외환위기 극복과 정권재창출에 모두 성공한 김대중 대통령의 연합정치에서 배웠어야 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선 180석을 줬는데도 뭘 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비판이 많다.
"그 180석은 '초과권력'이다. 문재인 정부 때 치러진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얻은 지역구 득표율은 49.9% 대 41.5%였다. 이 정도면 두 당의 의석 차이는 21석 정도여야 하는데, 실제론 79석(163석 대 84석)이었다. 180석 압승이라지만, 실제론 승자독식 소선거구제 아래 58석을 거저 먹은 셈이다. 지난 4월 총선도 마찬가지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지역구 득표율은 50.5% 대 45.1%로 이 정도면 14석 정도 차이인데 91석이나 벌어졌다. 77석 차이다. 압승이라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사표(死票)가 대량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소선거구제 아래 민심과 괴리된, 그래서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과대 의석이다."
-국민의힘에서도 이번 총선 뒤엔 '득표율은 지난 총선보다 오히려 올랐다'는 말이 나오긴 했다. 제도 차원의 고민이라기보다는 정신승리 쪽에 가까워 보였지만.
"정신승리 맞다. 이전부터 국민의힘 쪽에다가는 득표율만큼 의석을 가져가는 연동형 비례제도를 받으라고 계속 얘기해왔다. 최근의 전국 선거지표와 수도권 선거지표를 보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받는 게 더 유리한데,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영남당' '보수당' '노인당'으로 쪼그라들고 있는 국민의힘은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예전에 지역주의, 관료, 재벌, 언론의 도움으로 초과 권력을 누리던 그 때 상황을 생각하면 절대 안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떤가. 대선 때 불과 0.73%포인트 차로 승리했고, 지난 총선에선 참패했다. 윤 대통령이야말로 연합정치를 해야만 했던 것 아닌가.
"대통령은 국회의원보다 더 한 초과권력이다. 이 부분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민주화 이후 8명 대통령의 평균 득표율은 유효 투표 대비 44.65%, 선거인수 대비 고작 34.03%이다. 출발부터 소수파 대통령이다. 그런데 당선되면 100% 대통령처럼 행동한다. 더구나 한국의 대통령은 인사권, 예산권, 감사권 등 너무 권한이 많다. 오죽했으면 제헌헌법 때 미군정이 '이건 미국식 대통령제가 아니다'고 했겠나. 그렇기에 한국 대통령은 연합정치에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때마침 윤 대통령은 득표율 차이가 극히 적었던 데다, 민주당 검찰총장 출신으로 보수에 뿌리가 없고, 정치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불가피한 조건이었는데도, 자기는 해낼 수 있다고, 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 같다. 집권 초 제왕적 대통령들이 나중에 가서는 왜 모두 개헌을 얘기했을까,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권력 독식은 일종의 마약이다."
-오만함을 버리고 국민에게 받은 표만큼만 대표하라, 그 대표들끼리 합종연횡하는 합의정치를 하라는 제안이다.
"민주주의와 한국정치를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가닿은 결론이다. 우린 대통령제가 안정적이고 내각제가 불안정하다고 알고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 이기면 내가 하고픈 대로 한다,라고 밀어붙이면 진영정치, 대결정치밖에 남지 않는다. 정권 바뀌면 전 정권 정책은 바로 뒤집힌다. 파당적인 이슈만 화제가 되고 국가적인 이슈는 묻힌다. 그런 식으로 선거 한 번에 국가가 출렁대면 장기적 발전이 지장받는다. 실제 대통령제 국가와 내각제 국가 비교연구를 보면 1인당 GDP, 복지, 불평등, 지니계수, 민주주의 지수, 성평등 지수, 빈곤율 등 그 어떤 지표로 비교해봐도 내각제 아래 합의정치가 훨씬 우월한 걸로 나온다. 우리는 대통령제를 선호하니 분권형 대통령제를 해야 한다."
-합의해서 조정하면 '밀실야합이다, 왜 우리가 책임을 나눠야 하나' 반발이 적지 않다.
"에이브러햄 링컨, 빌리 브란트, 넬슨 만델라 같은 이들이 지지율이 낮아서, 의석이 부족해서 반대파를 내각에다 끌어들인 게 아니다. 100% 정부란 없다. 극도로 싫어하는 반대파라 해도 국민의 지지를 받는 민심의 지분이 있다면 그만큼 권력을 나눠야 한다. 그래야 타협과 합의가 가능하게 되고, 그 결과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국정이 자리 잡는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 그걸 빨리 깨달아야 한다."
-총선에선 패배했고 한국갤럽 기준 지지율은 20%대로 고착화됐다. 거기다 이제 곧 여당 대표가 선출되면 '미래권력의 시간'이 시작된다. 윤석열 정부는 무얼 할 수 있을까.
"가장 최악은 이대로 가다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다. 좀 더 나은 방법은 윤 대통령이 탈당한 뒤 거국내각을 구성해 양당 모두에게 빚이 있으니 중립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나은 건 민주당과 대연정을 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나은 건 합의를 통한 분권형 개헌이다. 지금 현행유지, 탈당과 중립내각, 대연정, 개헌 네 가지 선택이 있다. 뒤로 갈수록 더 나은 선택이다. 꼭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선택을 하길 권한다."
-김건희 여사 문제가 시끄럽다.
"의혹들에 대한 사실 여부야 알 수 없으나, 공적 인물이 아닌 김 여사의 일이 지금 현재 가장 중요한 공적 이슈로 부각됐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 상태를 해소해야 한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들의 구속도 받아들였다는 점을 상기해드리고 싶다."
박 교수는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 (1342~1398)이야기도 들려줬다. "정도전은 '궁궐이 정치를 하면 인치(人治)가 되고 대간이 정치를 하면 형치(刑治)가 된다, 전자는 나라가 망하고 후자는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따라서 정치는 의정부가 해야 한다'라 했습니다. 그게 조선왕조 500년의 원천이 됩니다."
인치와 형치, 그걸 뛰어넘는 정치. 14세기 봉건왕조 시대 정치인이 21세기 최첨단 디지털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 보낸, 참으로 무거운 경고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