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름은 ‘공포영화의 계절’이 아닌 ‘공상과학(SF)의 계절’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요즘 문학계에는 공포 소설이나 스릴러 소설 대신 SF소설이 쏟아진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SF소설은 1년에 10권 남짓 출간되곤 했지만, 이번 달 나온 책만 헤아려도 이를 훌쩍 뛰어넘었을 정도로 대세가 됐다.
SF소설의 홍수 속에서 한국 SF의 현주소를 가늠해 보려면 ‘앤솔러지(시, 소설 모음집)’가 제격이다. 최근 ‘빛’과 ‘다른 문명과의 첫 만남’을 주제로 하는 SF 앤솔러지 두 권이 나란히 나왔다. 현암사의 장르소설 브랜드 달다의 ‘퍼스트 콘택트’(김단비 문녹주 배지훈 서강범 서계수 이지연 전혜진 해도연 씀)와 문학과지성사의 ‘SF 보다-Vol.3 빛’(단요 서이제 이희영 서윤빈 장강명 위래 씀)이다.
‘거대한 안테나 거인, 정체불명의 빛나는 구체, 개구리처럼 살갗이 고스란히 드러난 채 뒤뚱거리며 걷는 짐승…’
대학과 대학원에서 물리학과 천문학을 공부한 연구원 해도연, 생물학을 전공한 배지훈, 영화감독 서강범 등 눈에 띄는 이력의 작가들이 모인 ‘퍼스트 콘택트’ 속 단편소설 8편은 드넓은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문명과의 첫 만남”의 순간을 그린다. 미지의 존재와의 첫 만남과 그로 인한 영향은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우주의 온도처럼 상상하기 어렵다. 바벨탑을 쌓기 이전의 인류처럼 한순간에 타국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거나(‘안테나 거인의 발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서강범) 태양이 쪼그라들고 태양계 행성들의 궤도가 모두 뒤틀리기도 한다(‘퀴라쓰’·해도연).
이런 상황에서 저마다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들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던 차별과 두려움을 드러낸다. 정혜진 작가의 ‘Legal ALIEN’에서 난민 출신이어서 사회에서 외계인 취급을 받던 ‘은별’은 위험한 외계인과의 첫 만남을 자청한다. 유기견에게 전 인류가 도움을 받는 배지훈 작가의 ‘인류는 강아지가 지키고 있다’와 뒤뚱이라는 짐승의 정체가 사람으로 드러나는 문녹주 작가의 ‘창힐이 가로되’는 관계 역전의 전복을 통해 현재의 과오와 모순을 짚는다. 앤솔러지의 마지막 작품(아니다 우리는 인류가·이지연)의 마지막 문장은 ‘퍼스트 콘택트’의 메시지 그 자체다. “…그들이라고 우리와 뭐 그렇게 다르겠어요?”
이른바 순문학 출판사인 문학과지성사는 지난해부터 1년에 두 차례 ‘SF 보다’ 시리즈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에서 누구보다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치며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작가 6명의 작품을 싣는 이 시리즈는 얼음과 벽이라는 주제를 지나 이번엔 ‘빛’에 닿았다. “빛은 우리를 보게 하고,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세계는 존재한다”고 앤솔러지의 서문에서 밝힌 문지혁 작가의 말처럼 세계의 확장을 꾀하는 이야기들이다.
‘SF 보다’에 실린 6편의 단편소설은 서사보다는 SF의 본질, 즉 과학적인 상상력에 기울어져 있다. 특히 형식에서 실험을 시도한 작품들이 눈에 띈다. 서윤빈 작가의 ‘라블레 윤의 마지막 영화에 대한 소고’는 인터넷에서 발견된 특수문자로 이뤄진 문서를 번역, 교정하고 주석을 달았다는 설정이다. 기자 출신인 장강명 작가의 ‘누구에게나 신속한 정의’는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아 기자가 AI 법률 서비스 기업의 대표를 인터뷰한 기사 형식의 소설이다. 각종 분쟁을 법정 밖에서 해결하는 AI 법률 서비스가 법원의 판결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근미래가 배경이다.
장 작가는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빛이라는 주제를 듣고 ‘의심하라/모오든 광명을’(‘오징어’·유하)이라는 시를 떠올렸다”며 “경계하지 않는 어떤 기술들이 사실 발목을 잡은 것들이 많기에 ‘빛’으로 다가오는, 광명이라고 여긴 기술들을 의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미래를 두려워하면 그 미래를 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SF가 필요한 이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