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랬더라면...’ 자살 사별자 괴롭히는 죄책감의 동굴

입력
2024.07.19 11:00
[김지은의 ‘삶도’ 시즌3 : 애도] <번외편>고선규 박사의 조언

편집자주

‘자살 사별자(Suicide Bereaved)’. 심리적으로 가까운 이를 자살로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살 사별의 아픔이 비단 가족에게 국한되는 일이 아님을 내포한 말이기도 합니다. 자살은 원인을 단정할 수 없는 죽음이라 남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고인을 쉬이 떠나보내지 못하고 ‘왜’라는 질문에 맴돕니다. 죄책감이나 원망이 들어차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애도’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난한 여정입니다. 한국일보는 올해 자살 사별자들의 그 마음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자살 사별자들이 마음으로 쓰는 부고, 애도’입니다.
‘죄책감의 거미줄’에 자신을 가둔 사람들
“외면 말고 하나씩 직시해 보는 게 도움…
고인의 마지막 아닌 삶을 생각하는 여정”



죄책감의 동굴. 자살로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이 갇히기 마련인 곳. 그곳엔 고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감, 그 죽음이 내 탓이라는 죄의식이 들어차 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그 동굴 속에서 남은 자는 고인의 마지막 순간을 재생하고, 또 재생한다. ‘이랬더라면…’ 같은 숱한 가정과 ‘이렇게 할걸’이라는 후회로 죽음 그 순간을 돌고 또 도는 것이다.

‘애도’ 2회에 출연했던 이민지씨는 실제 남자친구의 죽음 직후 ‘내가 그 사람을 죽인 거야’라는 죄책감에 압도됐다. 수개월이 지나서까지 ‘나 같은 건 살 가치가 없다’는 자기 비난에 휩싸였다. 동성 연인을 자살로 떠나보낸 김우진(가명)씨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죄책감이 자신을 엄습했다. 자느라 연인이 마지막으로 건 ‘보이스톡’을 받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알고 ‘그때 깨어 있었어야 했는데’라고 자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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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사별자들의 애도를 돕는 ‘애도상담’에서도 공들여 다루는 감정이 죄책감이다. 한국심리학회 자살예방분과 위원장이자 ‘애도상담’ 전문가인 고선규 임상심리학 박사는 죄책감을 냉정히 직시해보기를 권한다.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을 하나씩 떠올리며 근원을 헤아려보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경우의 수도 나열해보는 것이다.

고 박사는 “그 가정들을 머릿속으로 재현해보면 실현 가능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고인의 죽음 전 자신이 관련된 어떤 사건이 있었더라도, 그건 수없이 쓰러진 도미노 중 하나일 뿐이었다는 걸 종국에는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의 본질을 깨닫는 일 또한 중요하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후회인지, 자기 비난인지, 죄책감이 곧 애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죄책감의 동굴 밖엔 고인이 맞이한 죽음의 순간이 아닌 고인의 생애 전체가 있다. 얼마나 유쾌한 사람이었는지, 그가 지닌 장점은 뭐였는지, 고인에게 감사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따스한 가족 혹은 친구였는지 말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도 보인다.

고 박사는 “고인과 나를 죄책감이 아닌 삶과 연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이 상실을 끌어안고 받아들이면서 내 삶을 살아간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고 박사는 ‘애도’ 시리즈의 자문을 맡고 있다. 그간 나간 인터뷰를 토대로 고 박사의 조언을 담았다.

◇죄책감 꼽아보기… 정말 막을 수 있었을까

-자살 사별자들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정이 죄책감인 것 같아요.

“가까운 사람과 사별하면 따라오는 여러 감정 중 하나가 후회나 죄책감이에요. 자살 사별의 경우엔 ‘내가 이 죽음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감정이 들거나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상황에 놓인 경우가 많아 사별자의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어요. 자살은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죽음이라서 더 그렇죠. 그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고인이 죽기 전날 어떤 일이 있었다’, ‘내게 어떤 말을 했다’ 같은 걸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이 사별자들을 굉장히 압도하는 거죠.”

-그 과정에서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며 후회를 하거나 ‘내가 이랬어야 했다’고 자책하기도 하고요.

“자살 사별자들이 떠올리게 되는 경우의 수가 정말 무한해요. 실제 애도상담을 하다 보면, 죄책감의 거미줄에 자신을 가둬두고 있는 분들이 많죠. 그 죄책감을 들여다봐야 해요. 죄책감은 고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하거든요. ‘내가 이랬다면 살릴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 때문에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거죠.”

-그럴 수 있겠네요.

“고인이 없는 현실이 더 고통스러우니까 그냥 자신의 죄책감에 빠져 있는 거죠. 회피의 한 방법일 수도 있고요. 혹은 가혹하게 자책하는게 고인에 대한 애도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그렇게 평생 속죄하면서 살겠다는 거죠. 그런데 그게 속죄가 아니거든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한한 경우의 수일지라도 그걸 다 얘기해보는 게 필요해요. 죽 ‘리스트 업’ 해보는 거죠. 과연 현실적인 생각인가, 실제 그럴 수 있었는가 따져보는 거죠. 그리고 생각해 봐야 해요. 내가 이 죄책감의 동굴에서 왜 빠져나오지 못할까, 왜 다른 것을 보지 못할까, 더 힘든 것을 혹시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데 사별자들이 그런 감정을 토로할 때, 주위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네가 죽인 거 아니잖아. 그런 소리 하지 마’예요. (사별자들의) 입을 닫게 하는 말이거든요.”

-죄책감이 어떤 건지 적고 분석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까요.

“실제 그런 기법도 있어요. 예를 들어 ‘책임 파일’을 나누는 방식 같은 거죠. 머릿속으로 막연하게 떠올리기보다 하나씩 써 보면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니까요. 하지만 사람마다 맞는 방식은 달라요.”

◇자살 사별자들의 ‘마음 휴게소’

-2회에 출연한 이민지씨가 친구가 찾아준 상담센터에 애도상담을 신청하면서 ‘살려주세요’라고 썼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 느껴져서. ‘정말 나 때문인지, 아닌지 판명해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거잖아요.

“정말 진짜 큰 용기를 낸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힘들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용기거든요. 전 자살 사별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누군가한테 얘기하고 살려달라고 매달려도 된다고 생각해요.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의식할 수 없는, 그걸 뛰어넘는 고통이거든요.”

‘애도’ 2회의 이민지씨, 그리고 3회의 김우진씨는 모두 연인을 자살로 잃은 경우다. 민지씨는 이성 연인, 우진씨는 동성 연인이라는 점이 다를 뿐. 두 사람은 여성 자살 사별자들의 자조모임에 참여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자조모임은 비슷한 심리적 어려움을 가진 이들이 서로 경험을 공유하면서 치유해 나가는 모임이다.

-이민지씨나 김우진씨가 적극적으로 자조모임에 참여한 것도 큰 도움이 됐죠.

“자조모임에선 흔히 말하는 전문가가 줄 수 없는 치유가 오가요.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끼리 나누는 강한 유대감이 애도의 과정에 중요한 힘이 되더라고요. 나의 고유한 경험과 교집합을 찾아내기도 하고 그 안에서 위로를 받거나 해방감을 느끼기도 해요. 쉼터나 휴게소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시 세상으로 나가면 홀로 가야 하는 애도의 여정이 펼쳐지잖아요. 자조모임은 그 길에 있는 쉼터이자 휴게소인 거죠.”

-자조모임엔 차별이 없죠. 김우진씨가 어디서도 털어놓지 못한 얘기를 자조모임에서 안전하게 할 수 있었으니까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의 사별자들이 느끼는 감정을 ‘박탈된 애도’라고 해요. 성 소수자 자살 사별자들이 그중 하나예요. 가족에게 인정받는 경우도, 또 자신이 연인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적은 경우가 많죠. 고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인데도, 장례 절차나 고인의 유품 정리 같은 과정에서 참여를 차단당하기도 하고요.”

그러니, 그 ‘박탈된 애도’의 봉인이 해제되고 자신의 감정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 자조모임이기도 하다.

-이런 자조모임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양한 성격의 자조모임이 많아져야 해요. 죽음의 이야기가 다 다른 것처럼 남겨진 사람들의 경험도 마찬가지거든요. 게다가 청소년 자살률이 급증하는 추세잖아요. 그런데 청소년 자살 사별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애도상담이나 자조모임은 부족해요.”

고 박사는 인터뷰 막바지 ‘애도하는 사람’이라는 책 얘기를 꺼냈다. 일본 작가 텐도 아라타가 쓴 장편소설이다. 주인공 시즈토는 죽음이 있는 곳을 찾아다닌다. 부고 기사를 보고 전국을 돌며 죽은 사람을 애도한다. 고인이 생전 누구에게 사랑받고 누구를 사랑했는지, 사람들은 어떤 일로 고인에게 감사했는지를 물어 ‘애도 노트’에 적는 거다. 그것이 시즈토의 애도다.

“자살이라는 죽음의 방식이 주는 무게에 압도돼 다른 걸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그가 자살로 죽었다’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살았다’에 초점을 맞춘다면 좀 더 건강하게 애도의 과정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고인의 죽음이 아닌 생을 기억하는 여정, 그것이 애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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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버티컬콘텐츠팀장
사진= 정다빈 기자
영상= 박고은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