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수련병원들이 전공의 사직서를 2월 29일자로 수리하기로 합의했다. 정부가 사직서 수리 금지명령을 철회한 6월 4일 이후가 아닌 실제 사직서를 낸 2월 말로 처리해야 한다는 전공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전공의들은 정부 명령을 어기고도 행정처분 면제, 수련 기회 보장 등 각종 특혜를 받았을 뿐 아니라, 법적 부담을 덜고 퇴직금까지 제대로 챙기게 됐다. ‘증원 백지화’ 외에는 모든 요구사항이 관철된 셈이지만, 전공의들이 진료현장으로 돌아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
9일 의료계에 따르면 대한수련병원협의회는 이날 오후 회의를 열어 전공의가 병원을 떠나기를 원할 경우 사직 시점을 2월 29일로 통일하기로 합의했다. 전공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이 복귀를 설득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전공의마다 사직서를 낸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각 병원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적용할 계획이다. 수도권 한 수련병원 원장은 “6월 사직으로 처리하면 추후 전공의들이 사직 시점을 문제 삼아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압박감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앞서 정부는 6월 4일 행정명령을 철회하며 이날 이후 사직 처리가 원칙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병원마다 전공의 계약 형태가 상이하다는 점을 들어 사직 날짜는 당사자끼리 조율하도록 했다. 전공의들은 6월 사직으로 정리되면 병원을 나간 2월 말부터 5월까지 근무지 무단 이탈로 간주돼 법적·행정적 책임을 질 위험이 있고 퇴직금 산정에도 불이익이 있다며 반발해 왔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계약 주체 간 협의에 따라 2월 사직으로 처리된다 해도 사인 간 계약관계 변경이기 때문에 그간 내려진 행정명령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명령 철회 이후 모든 정부 대책은 6월 4일을 기점으로 효력이 발생한다”고 강조했다.
전날 정부는 사직하는 전공의에 대해서도 행정처분을 하지 않고 9월 수련을 시작하는 하반기 전공의 추가 모집에도 응시할 수 있도록 특례를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의료계에선 전공의가 2월 사직으로 정리되면 특례 없이도 내년 3월 수련 복귀가 가능하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복지부는 “전공의 재응시 자격은 6월 4일 기준으로 발생한다”며 “특례 대상인 하반기 추가 모집에 지원하지 않으면, 1년 이내 동일 과목 연차 복귀를 제한한 수련 규정에 따라 내년 3월 복귀는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정부는 각 수련병원들에 15일까지 전공의 사직 처리를 완료해 결원을 확정한 뒤 17일까지 수련환경평가위원회 사무국에 하반기 전공의 모집 인원을 신청하라고 공지했다. 지침을 이행하지 않으면 내년도 전공의 정원(TO)이 줄어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병원들이 더 적극적으로 전공의 복귀 설득에 나서도록 압박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전공의 비중이 30~40%에 달하는 병원 입장에서 인력 감축은 상당한 불이익이다.
수련병원협의회는 전공의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 데다 15일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물리적인 어려움을 고려해 전공의 복귀·사직 완료 시한을 1주일 늦춰달라고 복지부에 건의하기로 했다. 또 하반기 전공의 모집에 비수도권 전공의들이 대거 몰려 지역의료에 공백이 생기는 역효과를 우려하며 재응시 자격을 ‘동일 권역’으로 한정하는 방안도 제안할 계획이다.
정부가 형평성 논란에도 특혜나 다름없는 대사면 조치를 내놓고 수련병원들이 전공의의 마지막 요구까지 받아들였지만, 전공의가 얼마나 복귀할지 아직은 가늠하기 힘들다. 사직 후 하반기 전공의 모집에 응시하더라도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하는 만큼 본래 자리로 복귀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특히 5대 상급종합병원(빅5) 인기 과목(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의 경우 어렵게 들어간 만큼 포기하기가 쉽지 않아 결국 복귀를 택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사직에 따른 행정처분 부담이 사라지고 2월 사직 처리로 불이익도 덜어낸 만큼 대거 사직할 것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병원들은 전공의 복귀 여부에 상관없이 사직서 수리를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다만 내부 반발은 또 다른 변수다. 교수들은 제자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 전공의 추가 모집에 부정적 견해를 보이기도 한다. 빅5 병원 관계자는 “교수들은 전공의들을 ‘우리 자식’이라 여기고 있어 병원이 사직 처리를 강행하면 상당한 저항이 있을 것”이라며 “어렵게 다 키워놨는데 다른 병원 출신 전공의에게 자리를 내줄 수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