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산업안전 전문가인 앨런 스티븐스 산업안전보건협회(IOSH) 전략기획실장은 최근 한국일보와 만나 중대재해처벌법의 모태가 된 영국 기업과실치사법을 두고 "무관용 원칙으로 법을 적용하는 영국에서는 기업들이 법을 잘 준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경영계가 중대재해법 무용론을 제기하며 폐기를 주장하는 것과 달리 영국은 엄격한 법적용으로 효과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23명의 사망자를 낸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화재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빠르게 성장하는 신산업에 대해서는 발 빠른 위험성 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영국은 1970년대 산재 사망자가 연간 1,000여 명에 육박했지만, 기업과실치사법과 같은 강력한 산업안전 시스템을 구축해 현재 사망자 규모를 100여 명 수준까지 낮췄다. 우리나라 산재 사망자가 매년 600명을 넘는 것과 비견된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주최로 이달 1~5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국제 산업안전 세미나에 참석한 스티븐스 실장은 “안전보건 투자 비용은 2배가 넘는 수익률 효과를 가져온다”며 “안전은 비용이 아닌 투자”라고 역설했다.
그는 중대재해법과 관련해 “영국에서도 기업과실치사법은 5인 이상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고 있다”며 “법의 효과는 이미 입증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소규모 사업장에는 기업과실치사법이 부담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선입견이었다”며 “소규모 사업장의 기업인들은 근로자를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하면 재정적 타격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중대재해법이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가 비용보다 크다는 뜻이다.
아리셀 화재사고에 대해서는 “정부와 산업안전 모니터링 기관이 신산업에 대한 위험성 평가를 책임 있게 진행하고 우수한 안전관리 방법을 각 기업에 전파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리셀 화재 피해가 외국인 노동자에게 집중된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는 “노동자들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며 “외국인 노동자가 사업장 위험성 평가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스티븐스 실장은 근로자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을 일상적인 기업 활동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기업인들은 재정, 경영, 홍보 분야 리스크를 매일 관리한다”며 “근로자의 안전 역시 동일선상에서 관리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투자자들이 신규 사업에 투자할 때 재정과 회계뿐 아니라 직원의 안전도 고려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기업·투자자 등 모든 경제 주체가 근로자의 생명을 지키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파르게 성장하는 플랫폼 산업에서의 산재 예방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럽은 배달라이더를 보호하기 위해 플랫폼 업체 우버의 배달라이더를 근로자로 인정하고 기업이 보호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유럽연합(EU)이 지난 3월 배달라이더를 프리랜서가 아니라 ‘기업에 속한 근로자’로 인정한 상황을 말한다. 그는 “플랫폼 기업이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적절한 위험성 평가를 실시하도록 하면 위험의 외주화를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