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동북부 아삼주는 방글라데시를 사이에 두고 본토와 좁은 회랑으로 이어져 쥐젖처럼 달린 아대륙의 섬 같은 변방이다. 위로는 히말라야를 휘감아 온 거대한 브라마푸트라강이, 왼쪽으론 오랜 앙숙인 방글라데시 국경이 그어져 있다. 거친 산과 숲, 강과 호수의 땅. 그곳 도시와 먼 숲과 구릉지 곳곳에 수많은 인도 소수 부족이 수백 수천 년 된 각자의 전통과 신앙을 고수하며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을 환장하게 했다는 아삼차를 재배하며 산다.
길이 험해서 공권력은 느슨하고 병원·학교도 먼 그런 마을의 실질적 통치자는 ‘오자(oja)’ 혹은 ‘베즈(bej)’라 불리는 주술사들이다. 만악의 근원인 ‘쿠 만트라(Ku Mantra)’를 누르고 선의 만트라(Su Mantra)를 행한다는 오자는 악령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병자를 치유하고 공동체 질서를 헝크는 악령의 대리인 즉 마녀를 찾아내 심판하는 경외와 공포의 권력이다.
신비의 몰약과 권능의 주문 등 흑마술에 혹하는 이들이 ‘오컬트의 땅(Land of Occult)’, 또는 ‘흑마술의 수도(Capital of Black Magic)’로 꼽는 마양(Mayang)이란 마을도 그곳 브라마푸트라강 유역에 있다. 그곳 주민들은 고대 베다 시대의 인도 서사시 ‘마하바라타’가 찬미한, 적을 무찌른 용맹한 마법사들의 후손이 지금도 살아남아 불길한 기운을 다스린다고 믿는다. 인도 범죄기록국은 2010~21년 1,500여 명이 오자의 심판 즉 ‘마녀사냥’으로 살해당했다고 집계했다. 희생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비루발라 라바(Birubala Rabha, 1949.2.5~2024. 5.13)는, 인도 자유주의 매체 ‘The Statesman’에 따르면 “절대권력자인 오자의 권위에 맞선 인도 최초의 여성(이자 인도인)”이다. 그는 아삼주 변방 타쿠르빌라(Thakurvila)에서 태어나 날이 저물면 ‘다이니(daini, 마녀)’들이 먹잇감을 찾아 마을을 배회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2000년대 초부터 동북부 오지 마을들을 돌며 오자의 주술 권력에 맞서고, 두려워하는 주민들을 설득하며, 마녀로 낙인찍힌 여성 10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여성들과 함께 머리끈을 묶고 먼지 나는 시골 길들을 누볐다. 그들 마녀들의 반란끝에 2005년 주정부와 의회는 인도 28개 주와 8곳 연방 직할지를 통틀어 가장 엄격한 ‘마녀사냥 금지법’을 제정했다. 가부장 권력과 주술적 전통 규범에 맞서 수천년 어둠을 찢은 “인도의 한 줄기 희망의 빛” 비루발라 라바가 별세했다. 향년 75세.
만 6세 되던 해 가난한 농사꾼 아버지가 숨지면서 어머니가 생계를 도맡았고 라바는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10세가 되기 전부터 부엌일과 베짜기를 시작했다. 15세에 마을 농부와 결혼해 3남 1녀를 두었다. 억센 어머니를 닮아 라바의 성정은 무척 강했다고 한다. 아들 비슈누(Bishnu)는 “가정사든 마을 일이든, 불의를 보면 가만히 참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다. 아버지는 툭하면 주먹질이어서 부부 사이는 썩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폭행, 납치, 강간 등 여성 대상 범죄로 악명 높은 인도에서도 아삼주의 여성대상 범죄율은 인도 전체 평균의 약 3배에 달한다.
1985년 라바의 장남이 영문 모를 병에 걸렸다.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했고, 라바에게 주먹질을 할 때도 있었다. 마을 오자는 아들이 마녀와 사통해 임신을 시키는 바람에 병이 났다고, 사흘 뒤 마녀가 아이를 출산하면 장남은 죽는다고 예언했다. 하지만 아들은 사흘을 훌쩍 넘겨 살아남았다. 라바가 감당하던 불안과 두려움은 점차 의심과 분노로 바뀌어갔다. 그는 2016년 ‘힌두스탄 타임스’ 인터뷰에서 “내 아들은 죽지 않았고, 그 때부터 오자의 사술과 맞설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 결심은 마을 전체, 아니 수천 년 전통과 맞서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빈민 여성과 어린이 구호 및 여성 역량 강화를 위해 정부가 지원하는 시민단체 ‘마힐라 세바 사미티(Mahila Seva Samity, 힌디어로 여성복지위원회)’ 마을 지부를 만들어 오자를 비롯한 마을 원로들과 다양한 이슈로 티격태격했다. 장남 병세는 점점 악화돼 94년 실롱(Shillong)의 한 정신질환자 수용시설로 보내졌다. 이듬해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떴고, 그는 과부가 됐다.
마녀사냥은 종교만큼이나 먼 기원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초기엔 고립된 소수 공동체의 집단 내 갈등을 해소하고 결속을 다지는 효율적인 방편이었을 것이다. 그 기능과 목적은 점차 변질돼 인도의 경우 약자의 토지 등 재산을 빼앗고 사적 원한 등 감정과 욕망을 해소하는 제도적 수단으로 악용돼왔다. 마녀로 낙인찍히는 이들은 주로 힘없는 여성들, 즉 과부나 부모를 잃은 미혼 여성, 자녀 없는 노파 등이다. 남편과 사별한 직후 라바 역시 친척들에 의해 마녀로 고발당했다. 다만 그에겐 힘과 투지가 있었다.
마녀사냥은 주로 주민 고발이나 오자의 지목으로 시작된다. 누가 영문 모를 병에 걸렸거나, 전염병이 돌거나, 우물이 마르거나 폭우로 농사를 망쳐도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남편이 약국을 운영해 오자의 이권을 침해하는 바람에 아내가 마녀로 몰려 마을에서 쫓겨난 예도 있었다. 라바는 BBC 인터뷰에서 “그들은 마녀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어떤 근거든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오자의 치료가 먹히지 않으면 환자에게 거적을 씌워 마녀 이름을 댈 때까지 주민들이 날카로운 물체로 온몸을 찌르게 한다. 환자는 고통을 참다 못해 누군가의 이름을 대고, 그렇게 지목된 이는 고문을 당한 뒤 쫓겨나거나 살해된다. 시신은 토막을 내 여러 곳에 묻어 다시 부활하지 못하게 하고 그의 땅과 재산은 몰수한다. 가족이 있어도 두려워서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001년 10월 골파라에서 열린 마힐라 사미티 아삼주 총회에 라바도 마을 대표로 참석했다. 지부 의장 마모니 사이키아(Mamoni Saikia)는 참석자 26명 중 오직 라바만이 마녀사냥의 폭력을 규탄하며 위원회 차원에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회고했다. 그 일이 마을에 알려져 라바는 마을 대표직에서 쫓겨났다고 아들 비슈누는 말했다.
영상 저널리스트 비크람 싱(Vikram Singh)과의 2016년 뉴욕타임스 영상 인터뷰에서 라바는 “마녀사냥과의 전쟁 초기에 주민들이 떼로 몰려와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한 적도 있었다. 경찰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혼자 또는 위원회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동북부 오지 마을과 학교를 돌며 마녀사냥의 부당함과 불합리함을 알렸고, 마녀사냥 소문이 들리면 열 일 제쳐두고 그 마을로 달려갔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이 여자가 안 보이나요? 마녀가 어떻게 피를 흘립니까? 어떻게 정신을 잃고 기절하죠? 그녀도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당신들처럼 배고파 하고 추위와 더위를 타고 슬픔과 기쁨을 느껴요. 옷을 보세요. 당신들 옷처럼 낡지 않았나요? 당신들이 잿더미로 만든 그녀의 집은 어떻던가요? 마녀가 왜 마법을 쓰지 않고 진흙 바닥에 나무와 짚으로 지은 오두막에 살았을까요? 왜 당신들처럼 가난하고 굶주렸을까요? 오자가 하는 말을 모두 믿나요? 당신들은 양(羊)보다 나을 게 없어요. 제발 생각 좀 하세요.” 그의 열정적인 웅변이 끝나자 군중 속의 한 여성이 물그릇을 들고 와 매맞던 여자의 상처를 닦아주었고, 그제서야 남편과 아이도 울면서 그 여성에게 다가왔다. (www.thehindubusinessline.com, 2018년 기사 일부)
라바는 탁월한 웅변가였다. 열정적이면서도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었다. 라바의 오랜 동지인 의사 나티아비르 다스(Natyabir Das)는 “비루발라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들었다”고 말했다. 라바는 아무에게나 서슴없이 몽둥이를 휘두르는 인도 경찰에게도 주눅들지 않고 불의를 방관한다며 꾸짖곤 했다.
그는 2001년 당시 아삼주 경찰청장 쿨라다르 사이키아(Kuladhar Saikia, 1959~)를 찾아가 함께 싸워 달라고 호소했다. 델리대를 졸업한 미국 유학파 엘리트 경찰 사이키아가 경찰 개혁 및 주민 협력 프로젝트(Prahari Project)를 야심차게 시작한 무렵이었다. 사이키아는 “우리가 마녀사냥과의 전쟁을 시작하던 무렵에도 시민 대다수는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고 언론조차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라바가 나를 찾아왔고, 우리는 그가 무척 반갑고 고마웠다.(...) 그는 개인의 용기가 사회의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예다”라고 말했다.
라바는 2011년 마녀사냥 생존자와 활동가, 법률가 등과 함께 비영리 단체 ‘미션 비루발라(Mission Birubala)’를 창립했다. ‘미션 비루발라’ 사무국장 아나미카 바루아(Anamika Baruah)는 라바가 혼자서 35명의 여성을, 단체 출범 이후 55명의 여성을 구했다며 “라바의 용기는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나는 그녀만큼 용감한 여자를 만난 적이 없고, 그녀보다 용감한 남자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스위스의 국제 여성 평화 인권단체 ‘Peace Women Across the Globe’가 2005년 세계 평화를 위한 여성들의 헌신을 알리자는 취지로 그해 노벨평화상 여성 후보 1000명 추천 프로젝트를 전개하며 각국 여성단체에 후보자 추천을 청했다. 인도 시민단체들이 선정한 노벨평화상 후보가 라바였다. 그 소식이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되면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그의 존재와 활동이 인도 전역에 알려졌다. 그는 영어방송 채널 CNN-IBN이 인도 굴지의 재벌 릴라이언스 그룹 후원을 받아 제정한 ‘Real Hero Award’ 등 여러 상을 탔고, 구와하티 고하티(Gauhati)대로부터 길거리 시민 교육의 공을 인정받아 명예박사(2015) 학위를 받았다. 2021년 인도 정부도 그에게 ‘파드마 슈리(Padma Shri)’ 훈장을 수여했다.
아삼주 의회가 ‘마녀사냥 금지(예방 및 피해자 보호)법’을 만장일치로 제정한 것도 그 무렵인 2005년이었다. 연방정부 승인을 거쳐 2018년 발효된 그 법은 인도 전역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마녀사냥 금지법으로, 경찰에게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하고 법원 허가 없이 모든 조사 수단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기소된 피의자는 보석은 물론이고 합의-조기석방이 불가능했다. 마녀로 낙인만 찍어도 최대 50만 루피 벌금에 최고 7년 징역형에 처하고, 살인으로 이어질 경우 형법의 의도살인(IPC 302조) 조항을 적용하게 했다. 마녀사냥 피해자는 마을 전체의 따돌림과 차별을 못 견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예가 흔하다. 그 경우 피의자는 최고 종신형을 각오해야 했다. 주의회는 법 제정 과정에 라바 등의 의견을 폭넓게 수용했다. 한 현지 매체는 라바를 “인도 최강 마녀사냥금지법의 제1 설계자"라 소개했다. 법 제정 직후 인터뷰에서 라바는 “당연히 바람직한 진전이지만 미신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성 대상 범죄의 낮은 기소율과 유죄 판결율 등으로 법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2023년 12월에도 아삼주의 한 여성이 남편 등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민들에게 폭행당한 뒤 끌려가 산 채로 화형당했다. 경찰은 주동자 6명을 기소했다. 2021년 자르칸드(Jharkhand)주의 만 26세 여성 두르가 마하토(Durga Mahato)는 자신을 강간하려던 마을 유력자에게 저항했다가 앙심을 품은 그 남자와 남동생, 아내와 딸에게 마녀로 몰려 2시간 넘게 몰매를 맞고 길에 버려졌다. 약 2주 간 치료를 받고 퇴원한 마하토와 그의 남편은 가해자들을 경찰에 고소했지만, 주범인 남자와 남동생은 이내 보석으로 풀려났다. 폭행 후유증으로 만성 요통을 얻게 된 마하토는 주민들 등쌀에 마을 저수지에서 목욕도 못하고 공동수도조차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2023년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2018년 그를 인터뷰한 현지 매체 기자는 수많은 상과 명예, 찬사에도 불구하고 라바의 삶은 "가혹하리만치 소박했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자존심이 너무 강해 자기의 곤궁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해 그가 겪고 있는 궁핍의 정도는 여전히 침묵 속에 묻혀 있다”고 썼다. 라바의 꿈은 마녀사냥 피해자들을 안전하게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켜 직업을 얻게 해주고, 고문 트라우마를 치유해 다시 일어설 용기와 삶의 존엄을 되찾게 해줄 쉼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2021년 진행성 식도암 판정을 받고 투병해온 라바는 아삼주립암센터가 있는 가우하디의대병원에서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별세했다. 주정부가 치료비 전액을 부담했고, 주정부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주 총리를 지낸 현 연방 해운항만부 장관 사르바난드 소노왈은 “라바 바이데오(Baideo, 누나)는 뿌리 깊은 미신과 편견에 맞서 흔들리지 않는 결단과 용기로 여성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죽음은 아삼의 사회 구조에 결코 메워지지 않을 커다란 공백을 남겼다”고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