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6월 13일 오후 4시께, 한국일보 초판 마감시간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한국일보 외신부에 흥미로운 와이어(외신 기사)가 들어왔다. 캄보디아에서 일본군 종군위안부로 강제로 끌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할머니가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데스크의 지시로 외신부 기자들은 캄보디아 프놈펜 한국대표부를 수소문해 할머니를 최초로 만난 인물로, 외신에서 소개된 한국인 사업가 황기연씨와 접촉할 수 있었다.
잡음 섞은 휴대전화 통화에서 황씨가 말했다. “아리랑을 불러주니까 가사는 모르지만 멜로디를 기억하고는 울면서 흥얼거리더라구요. 열대지방에 썰매가 어디 있다고 썰매도, 김치도 알아요.”
한국일보 외신기자들은 확신을 갖고 이 여성이 일제에 의해 끌려간 위안부 피해자임을 직감했다. 외신과 황씨가 전한 사연을 최대한 정확하게 구성해 14일자 첫 보도를 내보낼 수 있었다.
한국일보의 힘은 최초 보도 이후 발휘됐다. 경쟁지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곧바로 현지에 기자를 파견했다. 훈 할머니는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한국에서 파견된 본보 여기자를 만난 뒤,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여자를 만났다"며 기뻐했다. 얼굴을 어루만지고 손을 쓰다듬으며 반가워했다. 취재를 통해 확보한 진동 마을 전경, 진동공립보통학교 졸업식 사진을 보고서는 "진동이 맞다. 동창 얼굴도 기억난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일보의 훈 할머니에 대한 현지 인터뷰 기사는 외신을 바탕으로 이뤄진 첫 보도가 나간 다음 날(6월 15일자)부터 곧바로 이어졌다. 이후 76일간 캄보디아 프놈펜과 국내를 샅샅이 훑는 취재를 펼쳤다. 수많은 특종이 쏟아졌다. 그 과정에서 외무부는 훈 할머니가 50여 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을 수 있도록 나섰고, 대검찰청은 유전자 감식을 통해 고향과 가족, 한국 이름 '이남이'까지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한국일보 도움으로 캄보디아 생활을 정리하고 1998년 5월 1일 영주 귀국한 훈 할머니는 한동안 경북 경산에 머물렀다. 그러나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데다 가족이 그리워 캄보디아로 다시 돌아갔고, 2001년 2월 15일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