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해에서 중국과 필리핀 사이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필리핀이 갈등 수위 조절에 나섰다. 양국 해경의 물리적 충돌에도 필리핀 측은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 발동을 고려하지 않는다”며 중국과 ‘외교’로 먼저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24일 AP통신 등에 따르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은 전날 남중국해 영해를 관할하는 팔라완섬 서부사령부를 찾아 “필리핀은 무력이나 협박을 사용하거나, 고의로 그 누구에게도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며 “전쟁을 유발할 생각도 없고 평화로운 분쟁 해결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중국’이라는 단어를 직접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중국을 겨냥한 유화성 발언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앞서 지난 17일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지역인 세컨드 토머스 암초(중국명 런아이자오) 인근에서 중국 해경이 보급 임무를 수행하던 필리핀 해군 선박을 공격했다. 당시 필리핀 군은 중국 측이 비무장 상태 필리핀 병사를 향해 마체테(날이 넓고 긴 칼)와 도끼, 망치 등을 휘둘렀고 이 과정에서 병사 1명의 엄지손가락이 절단됐다고 공개했다. M4 소총 8정 등 필리핀 무기가 파괴되기도 했다.
이후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며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필리핀은 미국과 상호방위협정을 맺고 있다. 한쪽이 무장 공격을 당할 경우 서로의 자기 방어를 도와야 한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도 지난 19일 엔리케 마날로 필리핀 외교장관과의 통화에서 상호방위조약에 따른 미국의 확고한 약속을 강조했다.
그러나 루카스 버사민 필리핀 행정장관은 20일 “충돌은 오해나 사고였을 것”이라며 “아직 이 사건을 무장공격으로 분류하지 않았고, 미국과의 방위조약 발동 계획도 없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마르코스 대통령도 평화적인 문제 해결 의지를 드러내며 긴장 수위를 높일 의도가 없음을 재차 강조한 셈이다. 남중국해가 아시아의 ‘화약고’가 된 상황에서 이번 충돌이 미국과 중국 사이 군사적 발화점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풀이된다.
다만 마르코스 대통령은 중국을 향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그는 “평화로운 기질을 묵인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며 “필리핀은 누구에게도 위협받거나 억압받지 않을 것이며, 국제법에 따른 자유와 권리를 행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서부사령부에서 세컨드 토머스 암초 보급 임무에 참여한 80여 명에게 훈장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