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위 오류 잡는 '매의 눈'... 손복환이 꾹꾹 눌러쓴 26번째 '교통안전 보고서'

입력
2024.06.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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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째 '교통 오류' 지적하는 택시기사]
80쪽 분량 수도권 도로 위험요소 총망라
가짜 표지판, 빗금표기, 아찔 횡단보도 등
주변의 비아냥에도... "계속하면 바뀝니다"

택시기사 손복환씨. 경력 54년 베테랑인 그의 택시를 타면, 다른 택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을 바로 발견할 수 있다. 스티어링 휠(핸들) 경적 버튼에 붙은 백색 메모지와 볼펜이 그것이다. 그는 평소 도로를 누비다, △운전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지판 △사전 표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횡단보도 △도로 주변에 방치된 위험한 적재물 등을 보면, 즉시 정확한 위치와 개선사항을 메모한다. 1976년부터 48년이나 이어온 습관이다.

물론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정차했을 때 짬을 내 간략히 적는다. 택시 영업을 마치고서 그렇게 적은 짧은 메모를 A4 용지에 자세히 옮겨 적는다. 주말엔 따로 시간을 내 현장 사진을 찍어 붙이고,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직접 약도를 그려 넣는다. 이렇게 여러 단계에 걸쳐 완성한 '안전보고서'들을, 손씨는 적게는 수십 장에서 수백 장씩 묶어 '건의서'라는 이름으로 엮는다. 지금까지 완성된 건의서만 무려 25개에 달한다.

그런 손씨가 이달 10일 드디어 26번째 건의서를 국민신문고에 제출했다. 경기(남양주·구리·하남·성남)와 서울(중·용산·강동·성동·광진·송파·노원·강남·동대문·중랑·양천·영등포) 일대 77개의 위험요소를 담았다. 건의서 분량만 80여 쪽에 달하는데, 문제점을 하나하나 자필로 적었다고 한다. 한국일보는 16일 손씨와 건의서에 지적된 '위험 장소'들을 함께 둘러봤다. 2006년 본보와 인터뷰한 뒤 18년 만의 동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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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번째 건의서... 77개 위험요소

손씨는 이번 건의서에 '구조물 도색'의 빗금 방향 문제를 주로 지적했다고 한다. 구조물 도색 빗금이라 하면,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도로 위 '노란색과 검은색 줄이 교차된 무늬'를 말한다. 이날 손씨가 기자들을 이끌고 찾은 용산구 삼각지고가차도도 빗금 방향이 잘못된 장소 중 하나다. "봐요. 양 갈래로 차량이 진입하는 곳 구조물의 도색 빗금 모양은 '∨' 형태가 되면 안 돼요."

국토교통부 '도로안전시설 설치 및 관리 지침'을 보면, 구조물을 왼편에 두고 차량이 진행할 경우 빗금은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를 향해야 하고, 오른편에 구조물이 있으면 빗금이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향해야 한다. 즉, 빗금의 아랫부분이 차량이 가야 할 쪽을 가리켜야 한다는 것. 따라서 해당 양 갈래 고가차도의 빗금은 손씨 말대로 '∨'형태가 아니라 '∧'형태가 돼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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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손씨가 이 빗금 방향에 집착하는 이유는 있다. "운전자들은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빗금 방향을 보고 진입로를 판단해요. 심리학적으로 그렇죠. 지침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빗금이 잘못되면 초행 운전자들이 가끔 당황해 사고를 냅니다."

불과 몇 년 전 경기 광주시 퇴촌삼거리 부근에서 한 운전자가 빗금표시가 잘못돼 있는 양 갈래길에서 머뭇거리다 그대로 머릿돌을 들이받았다. 손씨는 "어처구니없는 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내가 더 열심히 돌아다니며 고쳤어야 했나' 하고 자책하게 된다"고 말했다.

곳곳에 붙은 '거짓말 표지판'도 건의서에 담았다. "슬픈 현실이죠"라는 말과 함께 손씨는 핸들을 돌려 용산구 북한남삼거리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공사차량 진출입로 전방 50m' 표지판이 떡하니 서 있었다. "거짓말이에요. 표지판대로 가도 진출입로를 찾을 수 없어요." 그럼에도 해당 표지판은 수년간 길 위에서 운전자들을 혼란에 빠트렸다고 한다. 손씨는 "거짓말 표지판이 하도 많으니, 운전자들이 표지판을 안 믿는다"며 "신뢰와 직결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이 외에도 사소해 보이지만 안전과 직결된 문제점들을 세세하게 지적했다. '전방 280m 앞 유턴'과 같이 표현이 불필요하게 중복된 표지판, 동일한 내용의 표지판이 7개나 걸려 있어 운전자 시선을 과하게 뺏는 장소, 두 개의 표지판이 서로 모순된 내용을 전달해 혼동을 일으키는 곳, 조경수가 횡단보도를 가리고 있어 교통사고가 우려되는 지점 등이다.

원활한 교통 순환을 위한 제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성동구 영동대교 북단 IC에 '잠실대교 방향' 안내판이 애매하게 걸쳐져 있어 운전자들이 헷갈려 하니 위치를 시정해 달라"는 식이다.

"어차피 안 바뀐다" 말 들어도 계속 간다

주말을 포기해야 하고, 돈도 되지 않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이 지난한 일에 뛰어든 이유에 대해 손씨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아니라 '우리'가 중요하니까요." 손씨는 교통사고 여파가 개개인에 머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명피해라도 발생하면, 차량을 탄 당사자와 그들의 가족, 더 나아가 지역사회에까지 강한 트라우마를 남기기 때문이다. 손씨는 자신의 수고로움을 통해 사람들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고 이로 인해 교통사고가 줄어든다면, 우리 사회가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인지 손씨는 이번 건의서 머리말에 이런 문구를 적었다. "신뢰와 실천으로 보다 행복하고 보다 안전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시길 기원합니다."

"그래봤자 안 바뀐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그럼에도 48년의 꾸준함이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손씨는 2년 전 서울지하철 2호선 뚝섬역에서 구의역으로 가는 방향에 있는 대형 구조물 도색이 고쳐진 날을 기억한다. 38년간 그대로였던 빗금 방향이 손씨의 지속적인 건의로 바뀐 것이다. 손씨는 당시 도색 현장을 찾아 사진을 찍으며 형용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도 바뀌기 시작했다. "왜 그런 일에 매달리냐"며 핀잔을 주던 아내부터 친구들까지 이젠 "여기 도색 방향이 잘못됐다" "여기 표지판이 잘못됐다"며 제보를 한다. 손씨는 "조금씩 퍼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진다"며 "힘이 닿는 데까지 계속하겠다"고 웃어 보였다.

이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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