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도서관·김옥길 기념관을 보라...건축, 돈 쏟아붓고 커야 멋진 건 아니다

입력
2024.06.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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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종의 오늘의 건축]
<11> 작지만 큰 건축

편집자주

'정태종의 오늘의 건축'은 치과의사 출신의 건축가인 정태종 단국대 건축학부 조교수가 국내외 현대 건축물을 찾아 각 건축의 지향점과 특징을 비교하고 관련된 이슈를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4주에 1번씩 연재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앞을 향해 지속해서 나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더 높게' '더 넓게' '더 빠르게'라는 구호가 당연했다. 성장 논리는 도시와 건축 분야에도 적용돼 대도시와 대형 건축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발전 과정에서 일일이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문제점이 나타났다. 이런 상황을 자각한 건축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한 결과가 '작은 규모이지만 커다란 의미가 있는 건축'이다. 우리는 전형을 벗어난 건축 사례에서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고 자기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크고 화려해야 건축인가... 소박하지만 울림 있는 건축물

건축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어떤 건축은 건축가의 건축 철학을 바탕으로 건축물에 정체성을 부여해 주변과 차별화한다. 주변의 맥락을 파악하고 분석해서 공간적으로 풀어내는 건축도 있다. 어떤 의미도 없는 공간이 건축 작업을 거쳐 누군가를 위한 구체적인 장소로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소적 전환을 구현한 건축은 랜드마크처럼 웅장하고 눈에 띄는 건축물보다는 많은 사람이 찾지 않고 잘 몰라서 지나치는 도시인의 일상 속에 무심하게 놓여 있거나 숨겨져 있다.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화려한 곡선과 값비싼 건축 재료로 감싼 건축물이 아닌 기둥이나 벽체 등 단순한 건축 요소로 만든 소박하지만 울림이 있는 건축물이 그런 사례다.

순례하듯 방문한다...스위스 남부 '라 콘지운타 박물관'

스위스 건축가 피터 매클리가 설계한 스위스 남부의 작은 마을 지오르니코 포도밭 계곡에 '라 콘지운타(La Congiunta) 박물관'이 있다. 라 콘지운타는 '부모' '친척' '결합'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다. 마을 식당에서 박물관 열쇠를 받아 산책하듯 걸어가서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건축물은 수직의 벽, 수평의 바닥, 평지붕으로 구성된 단순한 직사각형의 기하학적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이 작은 박물관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 콘크리트 재료가 그대로 드러난 브루탈리즘(brutalism·재료와 구조를 가공 없이 이용하는 건축 양식)의 원초적 생생함을 간직한 채로 묵묵히 서 있다. 높은 천창에서 내려오는 자연의 빛만을 이용하기에 낮에만 전시 관람이 가능한데, 크지 않은 전시공간에서 취리히를 중심으로 작업하는 조각가 한스 조셉손의 조각과 부조들을 만날 수 있다. 마을에서 박물관으로 가는 과정과 전시공간을 돌아보는 경험은 순례자가 순례 길을 가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독특한 느낌을 안긴다. 박물관이 여름날 푸르른 자연 속에 있을 때와 한겨울 눈밭 속에 홀로 솟아 있을 때의 풍경은 매우 다르지만, 건축과 조각과 자연의 일체가 만드는 감동의 아우라는 변하지 않는다. 박물관 이름이 생소해서 기억하기도 어려운 곳이지만 한번 가보면 그 아름다움에 푹 빠질 것이다.


노출 콘크리트 상자의 반전...신촌 김옥길 기념관

서울 도시 한복판에도 이와 같은 건축 명작이 하나 있다. 건축가 김인철과 아르키움이 설계한 김옥길기념관이다.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을 기리기 위해 동생인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지었다. 연세대학 동문으로 향하는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작은 골목에 자리 잡은 기념관은 스무 평 남짓한 작은 노출 콘크리트 상자가 겹겹이 이어지며 반복되는 아주 단순한 건축물이다. 기념관의 외부는 사각 박스가 반복되며 공간이 구획되는 현대 건축이지만 내부는 하나의 열린 공간이 되는 한옥 같은 공간 구성을 구현했다. 한쪽에서 보면 노출 콘크리트로 닫혀 있는데 반대쪽에서 보면 유리로 열려 있어서 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고 낮과 밤의 분위기도 차이가 확연하다. 낮에는 건축 재료의 낯섦과 기하학적인 엄정함이 드러난다면, 저녁에는 사각 박스의 틈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에 의해 낮과는 다른 조형성과 따뜻함을 보여준다. 한국에 노출 콘크리트라는 건축 재료가 알려지지 않은 1998년 주택과 근린생활시설이 가득한 곳에 홀로 자리하게 된 회색 콘크리트 건축물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원성을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념관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단순하며 소박한 박스의 겹침이 보여주는 세련됨과 우아함을 나름 느꼈을 것이다. 건축가가 구현하고자 하는 의도와 개념을 건축주가 그대로 존중해준 최선의 결과가 바로 이곳이다.


다이아몬드는 크지 않아도 빛난다...일본 도쿄의 프라다 아오야마

도시는 점차 팽창하고 건축은 점점 커지는 게 보통이다. 현대사회가 너무 커지다 보니 건축이 들어설 곳이 줄어들었다. 역설적으로 도심 속 대지는 점차 잘게 쪼개지고 땅값은 올랐다. 도심은 작은 건물로 가득 차게 됐다. 작고 비싼 곳은 자신만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야 하니 명확한 개성의 디자인으로 단장한다. 일본 도쿄 오모테산도 지역은 전형적인 상업 거리 중 하나로 최신 현대건축의 전시장과도 같아 이곳의 건축물은 각자의 디자인으로 서로 지지 않으려고 과시한다. 그중 스위스 건축가 헤르조그와 드 뫼롱이 설계한 '프라다 아오야마'는 단순하면서도 잘 커팅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투명함을 보여주며 서 있다. 건축물의 형태는 건축물이 들어설 대지가 크지 않아 법적으로 허용된 땅의 규모를 최대한 이용한 모습이다. 건축물이 특정 형태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대신 다이아몬드 패턴으로 전체를 감싸 구조적으로 안정되면서도 굴곡진 유리를 통해 다양한 거리의 모습을 반사하는 전략을 썼다. 소위 '명품 거리'의 건축물을 과장되게 포장한 것이 아니라 '진품'만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드러낸 건축 디자인의 결과물이다. 다이아몬드는 크지 않아도 그 가치는 어떤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와 친밀해지는 기분...와세다대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

일본 도쿄의 명문 사학 와세다대학교에는 작지만 소중한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이 있다. 도쿄의 중심에 있는 150여 년 전통의 대학교에 이 학교 문학부 출신인 세계적인 소설가 하루키만을 위한 별도의 도서관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대학의 나이를 짐작할 만한 다양한 건축양식의 건축물과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로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자태의 도서관이 서 있다. 도서관이 들어선 원래 건축물은 오래된 연식의 단순한 흰색 박스 형태라 멀리서 보면 크게 눈이 가지 않는다. 현대 건축의 거장 구마 겐코는 단순한 곡선의 나무 루버(얇고 긴 평판을 평행하게 배열해 사이사이로 빛과 공기가 통하게 한 것)로 평범한 건물을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직선과 곡선의 대비는 외부 출입구와 연결된 노천카페까지 하나로 연결된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타나는 내부 중정의 천장까지 같은 개념의 디자인을 적용했다. 내부에는 전 세계 언어로 된 하루키의 작품이 전시돼 있고 하루키가 많은 소설에서 묘사했던 재즈 명곡을 들을 수 있는 음악 감상실도 있다. 규모가 크고 웅장하거나 대단한 역사를 기리는 랜드마크 공공건축과 달리 작지만 우리의 일상 같은 공간에서 위대한 소설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영웅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존경심을 표하는 것도 좋지만 가까이에서 친밀하게 관계를 맺는 것, 이것이 작은 건축이 해내는 커다란 영향력일 것이다.


도시를 버티게 하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건축들

세상을 살아가려면 누구나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 필요하다. 다만 철학자 르네 지라르가 말하는 모방 욕망으로 가득한 현대인이나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개츠비처럼 화려한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할 필요는 없다. 파티가 끝나고 축제가 마무리되면 누구나 각자의 집, 자기 침실로 가서 고요함을 마주하게 된다. 결국 내 몸을 받아주고 맡길 수 있는 곳은 나만의 작은 침대다. 그것이 인생이다. 도시와 건축도 마찬가지다. 화려하고 거대하고 과시할 만한 건축으로 가득한 현대 도시에서 항상 즐거운 이벤트만 벌어지는 건 아니다. 도시가 화려할수록 그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도 깊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작아서 눈에 띄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 않는 건축물, 자신만의 철학으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구도자·순례자처럼 작지만 속이 꽉 찬 건축물을 지나칠 때마다 진리를 발견한 듯 옅은 미소를 띠게 된다. 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덕분에 이 도시가 지금껏 잘 버텨주고 있다'고 속으로 감사 인사를 하게 된다.


글·사진=정태종 단국대 건축학부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