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이와 잇몸 구석구석 묻은 붉은 피가 섬뜩하게...
지난달 24일 첫 방송된 SBS 드라마 '커넥션' 1회 엔딩 장면에서 배우 지성은 이런 모습으로 병원 복도를 내달렸다. 상황은 이랬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응급실로 실려 간 그는 간호사가 그의 팔에서 뽑은 피를 채혈실에서 찾아내 꿀꺽 마시고 도망갔다. 피검사로 마약 투약이 들통날까 겁나서였다.
지성이 맡은 역은 경찰서 마약팀 경감 장재경. 마약범죄를 수사하던 그는 괴한들에게 납치돼 마약에 중독됐다. 중독된 채 마약 범죄를 쫓는 경찰의 위태로운 모습은 그가 병원에서 도망가느라 숨을 헐떡일 때 입에서 슬쩍 드러나는 핏빛으로 극대화됐다. 뱀파이어 같은 경찰이라니. 이와 입술 등에 피 분장을 도드라지게 한 채 달린 건 지성의 아이디어였다. '커넥션'의 김문교 PD는 "재경이 자신이 휘말린 마약 범죄의 전모를 알아내기 위해 달려 나가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라 지성이 연기 준비도, 상의도 많이 해왔다"고 말했다.
지성은 '커넥션'의 '신스틸러'다. "마약을 간절히 찾아 헤맬 때는 흐릿하고 생기 없는 '동태눈 연기'를 하다가도 경찰로 사건을 추적할 때는 명탐정 코난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보여주는 반전으로 캐릭터에 입체감"(박진규 드라마평론가)을 준다. 지성은 "마약에 중독된 모습을 연기하다 과호흡이 와서 촬영장에서 쓰러질 것 같은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고 말했다. "지성이 살인 사건에 연루된 고교 동창들, 재경의 마약 중독을 눈치 챈 동료 경찰 등과 1대 1로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들이 드라마의 백미"(김교석 방송평론가)다.
스릴러의 긴장감은 배우 간 경쟁이 아닌 소통으로 빚어졌다. '커넥션' 관계자에 따르면, 지성은 팀원 창수(정재광)와 폐쇄회로(CC)TV로 사고 정황을 추적하는 장면을 찍기 전 "네가 날 더 뻔뻔하게 바라봤으면 좋겠어, 갖고 노는 느낌으로"라고 말했다. 창수는 경찰 선배가 마약에 중독된 걸 알고 있는 후배로, 재경에게 압박감을 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연기 제안이었다. 이렇게 팀워크를 다진 '커넥션'은 "배우들에게 과몰입하며 보는 수사물은 오랜만"이란 입소문을 타고 시청률 10% 돌파(9.1%·15일 방송)를 앞두고 있다.
올해 데뷔 25년을 맞은 지성은 촬영장에서 종종 감독을 울린다.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드라마 '킬미, 힐미'(2015)를 연출한 김진만 PD는 "지성이 눈물과 콧물을 주르륵 흘리며 '이거 내 싸움이야'라고 절규하는 장면에서 목이 메 '컷' 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옛일을 떠올렸다.
지성 연기의 힘은 '디테일'에 있다. '킬미, 힐미'에선 교복 상의에 운동복 바지를 입고 여고생 요나를 연기했다. 고등학생들이 실제로 그렇게 입고 다니는 걸 지인에게 듣고 택한 의상이다.
드라마 '피고인'(2017)에서 감옥에 수감된 지성이 "내 빵 내놔"라고 소리 지르며 크림빵을 허겁지겁 먹는 모습은 영화 '황해'(2010)에서 하정우가 김을 여러 장 입에 욱여넣는 장면과 함께 야무진 '먹방 연기'로 회자한다. "일부 연기파 배우들이 캐릭터를 자신의 연기 스타일대로 표현한다면, 지성은 자신을 버리고 캐릭터에 몰입해 연기"(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한다. '피고인'을 만든 조영광 PD는 "죄수 느낌이 너무 강해 지성은 촬영장에서 이름 대신 '3866(죄수 번호)'으로 불렸다"고 제작 뒷얘기를 들려줬다. 그가 촬영 현장에서 '지소드'(지성+메소드 연기의 합성어)라 불리는 배경이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연기 대상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배우로서 지성의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MBC 범죄 재연극 '경찰청 사람들'(1993~1999)에서 범인의 친구로 나와 재연 배우로 연기를 시작했다. 그는 당시 서울 여의도 주변에 몰려 있었던 방송사들을 집처럼 찾아갔다. 드라마 제작국 문 앞에 쌓인 대본 인쇄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전남 여수에서 홀로 서울로 이사해 신문 배달 등으로 생활비를 벌며 배우의 꿈을 키우던 지성은 거처가 마땅치 않아 한강공원 벤치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노숙 생활은 드라마 '카이스트'(1999)에 캐스팅되면서 끝났다. '카이스트'에 출연하고 싶어 114에 전화를 걸어 제작사 번호를 알아낸 뒤 오디션을 봤고, 그 열의를 눈여겨본 송지나 작가가 배역을 따로 만들어줬다는 건 방송계의 유명한 일화다. 그의 연기 열정은 동료 배우들에게 때론 난감할 정도다. 배우 김성균은 "영화 '명당'(2018) 촬영 때 지성이 쉬지 않고 계속 연기 연습을 해 '지성 지금 연습 중이다'며 매니저한테 잔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마약 중독 경찰 연기에 대해 지성은 "심각한 (마약) 문제 해결 방안을 (드라마가) 제시할 순 없지만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재경의 모습 등을 통해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연기했다"고 말했다.
카메라 앞에 서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배우로서 지성의 책임감도 커졌다. 그는 "드라마 '딴따라'(2016)를 찍을 때 '어른인 내가 모자라고 세상이 모자라서 너희가 힘든 거야'란 대사를 애드리브로 했다"며 "아빠가 되다 보니 단순히 시청률을 올리는 게 아니라 무엇인가 의미 있는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더라"고 연기 철학이 바뀐 계기를 들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