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미국 최대 이동통신사 버라이즌 최고경영자(CEO)와의 면담을 시작으로 2주 동안 미국 일정을 이어간다. 초격차 경쟁력 약화, 노조 파업 등 회사 안팎의 위기 속에서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 31주년을 맞는 7일에도 별도 메시지 없이 실용 행보를 보일 계획이다.
삼성은 6일 "이재용 회장이 지난달 31일 호암상 수상식 직후 출국해 미국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 정관계 인사와 릴레이 미팅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이달 중순까지 뉴욕과 워싱턴DC, 실리콘밸리 등 동서를 가로지르며 미 정부·의회 관계자, 주요 고객사 대표를 만나고 현지 사업장을 점검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굵직한 일정은 4일 뉴욕에서 미국 최대 통신사인 버라이즌의 한스 베스트베리 CEO를 만나 차세대 통신사업과 갤럭시 판매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2020년 버라이즌과 7조9,000억 원대 네트워크 장비 장기 공급 계약을 맺고 미국 5세대(5G) 통신 시장에 진출했다.
이 회장은 이후 워싱턴DC로 날아가 미국 정부 및 의회 관계자들과 차례로 만남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시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투자로 미 정부로부터 64억 달러(약 8조8,000억 원) 규모의 보조금을 받을 예정이지만 고객 확보, 인력 확충 등 숙제를 안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보조금 규모는 확정됐지만 세부 규정 등 진짜 협상은 이제부터"라고 말했다. 워싱턴DC 일정 뒤에는 미국 서부 실리콘밸리에서 빅테크 CEO들을 만날 예정이다. 그는 지난해 5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등을 차례로 만났다. 최근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제때 공급할 수 있느냐가 국내 반도체 시장의 관심사라 두 사람의 회동 여부에 관심이 쏠릴 전망이다.
신경영 선언일에 맞춰 기념 행사나 사내 방송을 했던 예년과 달리 이 회장이 올해 실용 행보를 보인 배경은 삼성전자의 경영 위기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주력인 반도체 사업은 지난해 15조 원 가까운 적자를 냈고 HBM 등 AI 반도체 시장에서 주도권을 뺏겼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모바일 사업은 지난해 글로벌 스마트폰 출하량 1위를 애플에 내주기도 했다. 여기다 삼성전자 제1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은 7일 창사 이래 첫 파업을 예고한 상태다. 삼성전자 전체 직원(12만4,800명) 중 전삼노 조합원은 2만8,400여 명(23%)으로 노조가 파업을 선언한 지난달 28일에는 주가가 3%가량 급락했다.
한편 이 회장이 이번 출장을 계기로 '뉴삼성' 비전을 본격화할 거란 기대도 나온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번 출장은) 고객사 협력과 신성장동력을 발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3월 삼성전자 정기주주총회에서 "인수합병(M&A)과 관련해 많은 사항이 진척됐고 조만간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한 한종희 부회장의 말이 실현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