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학계가 그려온 고요한 추상화를 (인류세 주창론자들이) 현대의 문제와 연관시킨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지질학계에서 인류세를 새로운 지질시대로 공인하는 작업에 앞장섰던 얀 잘라시에비치가 지난달 영국 과학전문지 ‘뉴사이언티스트’에 쓴 글의 한 대목이다. 인류세 개념을 제안한 노벨화학상 수상자 파울 크뤼천이 세상을 뜨고 인류세 주창론자의 대부로 인식된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질학계는 ‘인류세실무그룹’을 만들어 이 사안을 검토해 왔다. 이들은 1950년대를 인류세의 시점으로 제안한 안을 냈는데, 이는 신생대 제4기를 다루는 학자들의 모임인 ‘제4기층서위원회’에서 올해 초 부결됐다.
애초부터 지질학자들은 인류세에 거부감을 표명했다. 불과 70년 전에 새로운 지질시대가 시작됐다는 주장은 수십만~수십억 년 단위의 시간대를 다루던 이들에게 말도 안 돼 보였을 게 분명하다. 이에 대한 잘라시에비치의 주장은 ‘70년이 짧더라도 결정적 증거가 있다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로 요약된다.
다수의 인류세 주창론자가 인류세의 시점으로 꼽는 1950년대부터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인구가 폭증하고, 닭 뼈가 쌓이고, 온실가스 농도가 치솟아 기상이변이 일상화됐다. 완만하게 오르던 변화의 곡선이 1950년대를 통과하며 자동차 액셀을 밟듯 급가속하기 때문에 이 시대부터 지금까지를 ‘대가속기’라고 부른다. 그간의 지질시대에 존재하지 않던 인공 방사성물질이 공기에서 검출되고 미세플라스틱이 생선 반찬과 바닷물, 입원 환자의 링거액에도 떠도는 시대다.
인류세 시작에 관해 두 가지 가설이 더 있다. 영국에서 기후변화와 지구시스템과학을 연구하는 사이먼 루이스와 마크 매슬린이 쓴 ‘사피엔스가 장악한 행성’은 인류의 역사를 따라가며 지구에 새긴 깊은 각인을 보여준다.
하나는 농업이 본격화된 5,000년 전에 인류세가 시작됐다는 가설이다. 간빙기가 끝나고 9번째 빙하기가 도래할 참이었다. 하지만 인류가 숲을 벌목하고 습식 벼농사를 하면서 줄어들던 온실가스가 반전해 오르기 시작했다. 인간이 도래하는 빙하기를 멈춰 세웠다.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범한 뒤인 1500년대 말~1600년대 초를 인류세의 시점으로 보자는 주장도 있다. 남극의 빙하코어(빙하에 구멍을 뚫어 시추한 원통 모양의 얼음 기둥)를 분석하면, 1610년에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유럽인과 접촉한 아메리카 원주민이 전쟁과 전염병 등으로 몰살하자, 이들이 농사짓던 경작지가 숲으로 복원됐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인류세’라는 명칭이 환경위기의 계급적 원인을 은폐한다면서 ‘자본세’라고 바꿔 부르자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이 식민지에서 대규모 산업적 영농을 시작하면서 이산화탄소 농도는 다시 높아진다. 지구 최초의 행성적 비즈니스가 출현한 이 시기를 사회과학자들은 자본세의 시점으로 본다.
새로운 과학적 지식은 언제나 과거의 오래된 관점을 흔들기 때문에 인류세 공인이 저항에 부딪힌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류세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온실가스 농도는 기후와 식생, 생물종의 멸종과 탄생을 주관한다.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이후, 아니 과거 300만 년 동안 이렇게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은 적이 없었다. 280ppm이 150년 만에 절반이 늘어 420ppm을 통과했다. 우리가 여전히 같은 시대에 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