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낳을 병원도, 분만 의사도 없다… "출산 인프라 붕괴 직전"

입력
2024.06.0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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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단체 5곳 한자리서 긴급 기자회견
"의료진 부족·소송 리스크·낮은 수가로 고통"
고위험 산모 느는데 병원·의사는 되레 급감
저출생 문제와도 연관 "특단 대책 마련해야"
평생 이 말을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이 자리에 섰다. 의대 증원이 아니라, 산부인과 인프라 붕괴와 멸종 위기에 대한 얘기다.

의사들로 구성된 전국 산부인과 단체 5곳(대한산부인과학회·대한모체태아의학회·대한주산의학회·대한분만병의원협회)이 4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분만 인프라가 처참하게 무너졌다"고 토로했다. 의사들은 한국일보가 지난달 보도한 '산모가 또 죽었다: 고위험 임신의 경고' 기획기사를 언급하며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산과 교수와 개원의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자회견을 연 것은 처음이다.

"분만 가르칠 교수도, 전공의도 없다"

산부인과 단체들은 이날 오후 서울 중구 성공회빌딩에 모여 "산부인과 전문의가 급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사들은 저출생으로 분만 자체가 줄어든 상황에서 △낮은 수가 △소송 리스크 △격무 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산과(분만)에 지원하는 전공의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고, 산과 전문의조차 분만을 포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박인양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10여 년 전까지는 산과 전공의 경쟁률이 2대 1은 됐는데 최근에는 산부인과 전체가 미달 상태로 충원율이 70% 수준"이라며 "특히 분만 의사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신규 산부인과 전문의는 2008년 177명에서 지난해 103명으로 줄었다.

산과 의사를 가르칠 대학병원 교수들도 빠르게 줄고 있다. 교수가 줄어들면 갈수록 증가하는 고위험 산모 진료에 구멍이 뚫리고, 의대생들은 분만을 배울 기회를 잃게 된다. 오수영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정년 퇴임으로 2041년에는 현재의 31% 수준으로 교수들이 급감할 예정"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분만 수요가 적은 지방에선 교수들이 더욱 빠르게 사라질 것으로 예상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소송에 내몰리고 병의원 폐업"

산부인과 단체는 이날 의료진의 '소송 리스크'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한 해 분만이 23만여 건이라면 산모 사망 50건, 뇌성마비 50건 정도 된다"면서 "사건 하나에 12억 원을 배상한다고 해도 저출산에 투입되는 비용과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 국가가 (무과실 사고에 대한) 배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출산 가능한 병원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도 문제로 꼽혔다. 홍순철 고려대안암병원 교수는 "수도권에서도 분만 병원을 포기하는 병원이 속출하고 있다"며 "분만 기관 감소는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고 전국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분만 가능한 산부인과는 2013년 706곳에서 지난해 463곳으로 감소했다. 전국 시군구 250곳 가운데 산부인과가 없거나, 있어도 분만이 어려운 지역도 72곳에 달한다.

홍재식 대한분만병의원협회 정책이사는 "서울에서 작은 분만 병원을 내려면 30억 원이 필요한데 의사와 간호사를 구하는 게 힘들다"며 "한 달에 25일 당직하고 매일 외래환자를 보고 있을 정도로 인력난이 심각하다"고 설명했다.


송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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