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동해안 인근에 대한 석유 탐사 및 시추 역사는 50년이 넘었다. 그사이 1998년에 동해 가스전 한 곳이 발견돼 실제 개발까지 이어졌지만 석유는 경제성 있거나 의미 있는 평가를 받는 발견이 없었다. 박정희 정부가 경북 포항시 일대에서 "석유가 발견됐다"고 공식 발표한 적은 있지만 발견된 검은 기름이 원유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며 해프닝에 그쳤다.
국내 석유 탐사 및 시추는 1970년대 시작됐다. 1970년 1월 산업통상자원부의 전신 상공부가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을 만들면서 약 30만㎢에 이르는 국내 대륙붕을 7개의 해저 광구로 확정하고 석유 탐사 시대가 열렸다. 실제 1972년 미국 걸프사가 동해 6-1 광구에서 해저 4,626m까지 파본 게 우리나라 최초의 대륙붕 석유 탐사 시추다. 그러나 석유가 묻혀 있는지 확인은 실패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서 "석유가 발견됐다"고 발표해 발칵 뒤집혔다. 포항 영일만 일대를 시추하는 과정에서 드럼 한 통 분량의 검은 기름을 봤다는 게 근거였다. 하지만 해당 기름을 분석했더니 인위적 정유 과정을 거쳐야 나오는 '경유'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결론이 나왔다. 휘발유, 경유, 등유, 가스 등 여러 물질이 골고루 섞여 있어야 하는 원유는 아니었던 것이다. 산유국의 꿈이 허무하게 거품으로 끝나고 마는 순간이었다.
2차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정부는 국내 대륙붕 석유 탐사를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79년 한국석유공사를 세웠다. 1983년부터는 석유공사가 탐사를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해외 석유개발기업들도 동해안을 중심으로 샅샅이 살폈지만 석유를 찾지 못해 1990년대 초까지 철수했다.
석유공사는 이후 1997년까지 국내 대륙붕 지질 구조를 집중적으로 살폈다. 그 결과 서해분지, 울릉분지, 제주분지 등 3개 대규모 퇴적 분지를 찾았다. 광구 중심의 대규모 탐사를 해오던 석유공사는 이때부터 퇴적분지별 중소형 탐사로 전략을 바꿨다. 그 결과 1998년 동해 울릉분지 6-1광구 울산 앞바다에서 가스층을 발견했다.
해당 가스층은 '동해-1 가스전'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2004년 9월부터 실제 가스 생산에 나섰고 하루에 약 1,000톤(t) 규모의 천연가스를 얻고 있다. 정부는 이후 울릉분지와 동해-1 가스전 인근 해역을 중심으로 '유망 지역' 탐사를 꾸준히 진행했다.
하지만 그 이후 20년 가까이 생산까지 가능한 또 다른 석유 및 가스층은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