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만델라당' 30년 만에 과반 실패… "친시장·흑인 정체성 흔들릴 것"

입력
2024.06.0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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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 40.2% 득표… '군소 연정' 45%도 붕괴
연정 대상 야당 구도 '시장·흑인' 두고 엇갈려
"아프리카 최대 산업 국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집권 여당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총선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흑백 분리 차별) 종식 이후 30년 만에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부패와 경제난이 패배 이유로 분석된다. 향후 남아공 정국에 극심한 혼란이 예상된다.

부패·실정에 무너진 30년 과반 아성

1일(현지 시간) AP통신에 따르면 남아공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달 29일 치러진 총선 개표율 99.9% 기준 ANC가 득표율 40.2%를 얻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결과는 여러모로 참패로 해석된다. ANC는 1994년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백인 정권을 끝내고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집권한 이후 줄곧 50% 넘는 득표율을 유지해 왔다. 인종차별 정책에 맞서 싸웠던 공로를 인정받은 덕이다. 그러나 각종 부패 및 경제 실정 탓에 이제는 50%는커녕 '45%선'마저 놓치게 됐다.

득표율 45%는 ANC가 잉카타자유당(IFP)·애국동맹(PA) 등 흑인 군소 정당과 큰 충돌 없이 연정을 구성해 사실상 단독정부를 꾸릴 수 있었던 마지노선이었다. 남아공은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회 400석을 배분하며, 의회 과반의 동의로 대통령을 선출한다.

문제는 ANC가 누구와 손을 잡든 정치적 격변이 예고돼 있다는 점이다. 야당들이 '인종'과 '시장주의'를 두고 복잡하게 양극화돼 있기 때문이다. 득표율 22.8%를 얻은 제1야당 민주동맹(DA)은 ANC처럼 친(親)시장 성향이지만, 주요 지지 기반이 백인이며 흑인 지원 정책을 반대한다. ANC가 DA와 손을 잡는다면 흑인 기반 정체성이 크게 흔들리게 된다. 반면 ANC에 뿌리를 두고 있는 흑인 정당 움콘토위시즈웨(MK·14.6%)와 경제자유전사(EFF·9.5%)는 모두 극단적인 국가 주도 경제 체제를 지향하는 포퓰리즘 정당으로 분류된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러한 곤경은 남아공의 정치적 지형을 뒤흔들고 ANC를 변곡점으로 내몰 것"이라며 "ANC가 연정 파트너로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지지 기반의 특정 부분이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복지·외교·국가재정 분야 등에서도 ANC는 야당들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부패 혐의에 보복' 주마 전 대통령

시릴 라마포사 현 대통령의 거취를 둘러싼 논란도 주요 변수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자유주의 성향의 라마포사 대통령은 DA와의 연정을 선호하지만, ANC 안팎에서 선거 참패 책임론이 분출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MK를 이끄는 제이컵 주마 전 대통령이 라마포사 대통령을 끌어내린 뒤 ANC·MK 연정 구성에 성공할 경우 혼란은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주마 전 대통령은 각종 부패 혐의로 인해 2018년 당시 대통령 직과 ANC에서 축출됐다. 이를 주도한 게 부통령이었던 라마포사 현 대통령이다. 이에 주마 전 대통령은 공공연하게 '보복'을 예고했고, 이번 선거에서 제2야당 대표로 정계에 복귀했다.

블룸버그는 "라마포사 대통령이 사임한다면 이는 주마 전 대통령의 승리가 될 것"이라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산업화된 국가가 미지의 영역으로 밀려났다"고 평가했다.

김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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