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에서 2심 법원이 역대 최대 규모의 재산분할을 결정했다. 과거를 돌이켜볼 때 SK그룹 성장엔 노 관장의 부친 노태우 전 대통령(1988~1993년 재임)의 도움이 컸다는 주장이 인정됐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 비자금 300억 원이 SK에 흘러갔다는 의혹도 사실로 판단했다.
서울고법 가사2부(부장 김시철)은 30일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최 회장은 피고 노 관장에게 재산분할로 1조3,808억1,700만 원을, 위자료로 20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최 회장이 노 관장을 상대로 제기한 이혼 소송은 1심과 마찬가지로 기각했다.
이날 법원이 인용한 금액은 2022년 1심 재판부가 인정한 재산분할 665억 원과 위자료 1억 원의 20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재판부는 이들 부부의 재산 총액을 약 4조115억 원으로 계산했고, 이 중 35%는 노 관장 몫이 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산분할 액수는 현재까지 알려진 분할액 중 최대 규모다.
이런 '20배의 차이'는 1심과 달리 2심이 "SK(주) 주식을 재산분할 대상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에서 비롯됐다. 앞서 "최 회장이 보유한 SK(주) 주식의 50%(약 1조3,500억 원)를 달라"는 노 관장 청구에 대해 1심은 "노 관장이 주식 형성과 가치 상승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물리쳤다.
즉 1심은 "SK(주) 주식은 최 회장 부친인 최종현 전 회장에게 물려받은 특유재산"이란 최 회장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특유재산은 결혼 전부터 가진 고유재산 등으로, 보통은 이혼 시 분할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에 법조계에서도 "특유재산에 대한 판단은 2심에서도 유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2심은 그러나 SK그룹이 사돈인 노 전 대통령 덕에 몸집을 불릴 수 있었다고 판단을 달리했다. 특히 SK그룹의 전신인 선경그룹이 1992년 태평양증권을 인수하고 국내 최초 이동통신 사업자로 선정된 과정에, 당시 대통령인 노 전 대통령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고 노 관장의 기여분을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최 전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을 보호막이나 방패막이 역할로 보고 지극히 모험적인 경영 활동을 감행해 결과적으로 성공했다"며 "(당시 여러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금융감독원 등이 움직이지 않은 것을 보면 노 관장 측이 무형적 기여를 한 게 맞다고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선경그룹의 태평양증권 인수 자금에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 원이 쓰였는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공방에서도, 재판부는 노 관장의 손을 들어줬다. 앞서 노 관장 측은 그간 밝힌 적 없는 선경그룹 명의 약속어음의 존재를 2심에서 새로 언급하며 "비자금에 대한 대가"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2심 초반까지 원고는 최 전 회장 개인 돈으로 부족한 인수 자금을 댔다고 하다가, 이후 피고 측이 이러한 주장을 하자 계열사의 자금을 유용했다고 번복했다"면서 "계열사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횡령이 되는데도, 계열사 자금이라는 증거는 없고 실제 돌려준 적도 없다"고 밝혔다.
선고가 끝난 뒤 노 관장 측 김기정 변호사는 "혼인의 순결과 일부일처제에 대한 헌법적 가치를 깊게 고민해 주신 아주 훌륭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최 회장 측 변호인단은 입장문을 통해 "항소심 재판부는 처음부터 이미 결론을 정해놓은 듯 편향적이고 독단적으로 재판을 진행해왔다"면서 "판결에서 노 관장 측 일방적 주장을 사실인 것처럼 하나하나 공개한 것은 가사재판의 비공개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한 행위"라고 유감을 나타냈다.
최 회장은 지금의 SK그룹의 뼈대를 세운 최 전 회장의 맏아들로, 미국 유학 시절 만난 노태우 대통령의 맏딸 노소영 관장과 1988년 결혼했다. 그러나 2015년 동거인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 사이에서 낳은 혼외 자녀의 존재를 언론을 통해 알리며, 혼인 생활 27년 만에 이혼을 예고했다.
노 관장은 최 회장의 조정 신청까지 거부하며 4년여간 "가정을 지키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후 2019년 12월 맞소송을 내며 위자료 3억 원과 최 회장의 SK(주) 주식 절반을 요구했지만, 1심에선 최 회장이 보유한 일부 계열사 주식 및 현금 등에 대해서만 665억 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이어진 2심에서 노 관장은 재산분할 액수를 2조30억 원으로 상향하고 분할 형태도 주식에서 현금으로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