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 이지현씨. 그는 1989년 국회 광주특위에서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사례를 증언하기 위해 승려가 된 피해자를 만나 자료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뜻밖에 야당 의원들조차 그를 증인으로 채택해주지 않았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윤경회 팀장은 “당시 청문회는 특별법을 만들어서 책임자를 처벌하는 게 관건이었다”며 “그에 비해 이 건(성폭력)은 사소하다, 쟁점을 흐릴 수 있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이거에 집중하기에는 좀 버겁다, 국민들이 이걸 얼마나 믿어줄까 등의 이유로 증언대에 오르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사소한 것, 쟁점이 아닌 것···. 누군가에겐 생을 놓을 만큼의 고통이 권력·정치라는 스펙트럼을 통과하면 의미가 증발되고, 무(無)화되는 것은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다. 물론 당시의 노력으로 전두환·노태우 등은 부족하나마 처벌을 받았지만, 5·18 성폭력 피해자들은 공적인 진상조사 한번 받지 못한 채 40년간 피폐한 삶을 살았다. 책임자 처벌을 위해 피해자를 외면해야 한다면, 과연 책임자 처벌은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일까.
권력과 정치의 속성은 바뀌지 않는 것 같다. ‘학살자 처벌’이라는 쟁점이 ‘성폭력 증언’을 사소화해서 밀어냈듯이, 21대 국회 막바지에 소위 여야가 꼽은 ‘쟁점 법안들’이 나름의 의미를 갖는 다른 법안들을 주변화하고 밀어내는 것이 실시간 보도됐다.
양육 의무를 저버린 친부모 상속권을 제한하는 ‘구하라법’, 국내 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 출생등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외국인아동의 출생등록에 관한 법률안’, ‘체액 테러’ 처벌을 위한 성폭력특례법 개정안, 반도체 등 국가전략시설 투자액 세액공제 기한을 2030년까지 연장해주는 ‘K칩스법’ 연장안,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공급을 위한 ‘국가 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여야가 합의했거나 이견을 좁힌 법안들이며, 누구에겐 새 생명과도 같다.
그런데 국민의힘이 상임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 개의를 거부해서 이 법안들의 통과가 무산됐고, 21대 국회 종료(5월 29일)로 자동 폐기됐다. 더불어민주당이 채 상병 특검법, 민주유공자법 등 쟁점법안의 본회의 통과를 추진한 데 반발해, 민생법안들까지 여당이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이번 민생법안 무더기 폐기의 책임은 분명 여당에 있고, 더 핵심으로 들어가면 결국 윤석열 대통령이라 하겠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하고, 여야가 의견을 좁힌 국민연금 모수(보험료율·소득대체율 조정) 개혁안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불능의 정치를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기이하고 이질적인 장면이 있었다. 지난 24일 저녁 윤 대통령이 ‘소통 강화’를 위해 대통령실 앞 마당에서 출입기자들에게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요리해서 대접했다고 한다. 기자들과 잡담이나 하는 게 과연 소통인지 의문이며, 그게 소통이라면 소통의 성과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곤 닷새 후(29일) 그 전날 야당에 의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전세사기특별법 등 4개 법안에 무더기 거부권을 썼다. 취임 후 14번째 거부권 행사이다. 거부권 과잉도 문제지만, 최소한 민생법안을 무시하는 당정의 자세 정도는 바꾸어야 계란말이(소통)의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28일 채 상병 특검법 재투표가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되는 과정을 방청석에서 지켜보던 해병대 예비역들은 여당 의원들에게 “계란말이나 해라”라고 외치다 제지당했다. 결과 수렴으로 이어지지 않는 ‘소통을 위한 소통’은 조롱과 분노만 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