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을 전쟁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나 이스라엘이나 피장파장이라는 국제 사법기구의 판단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도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피란민 집중 지역 지상전이 옳은지를 두고 갈등을 빚던 네타냐후 총리를 두둔하고 나서면서다. 재선을 노리는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서는 친(親)이스라엘 정책에 반대하는 아랍계와 진보 성향 지지층을 지키기가 더 힘들어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20일(현지 시간)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사장이 전쟁범죄 혐의로 이스라엘과 하마스 지도부 양측에 대해 체포영장을 청구하자 곧장 성명을 내고 강하게 비난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에는 어떤 등가성도 없다”며 “터무니없다(outrageous)”는 원색적 표현까지 동원했다. “항상 이스라엘 편에 서겠다”고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역성은 든든했다. 이날 백악관에서 열린 ‘유대계 미국인 유산의 달’ 축하 행사에서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은 (이스라엘에 의한) 학살이 아니다”라며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반(反)유대주의에도 우려를 표한다”고 말했다.
미국뿐 아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 대변인은 “휴전이나 인질 구출, 인도주의적 지원에 이번 조치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이스라엘은 ICC 관할권이 미치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지적했고, 독일 외무부 대변인은 “(양측이) 동등하다는 잘못된 인상을 줬다”고 질타했다.
국제사회의 비난, 바이든 대통령과의 반목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네타냐후 총리에게는 망외의 소득이다. 그는 영상 성명에서 “이스라엘 총리로서 이스라엘군과 집단학살자인 하마스를 비교하는 ICC 검사장의 역겨운 행위를 거부한다”며 “완전한 현실 왜곡이고 신(新)반유대주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위기를 내부 결속에 활용한 것이다.
여전히 이스라엘은 미국이 만류 중인 가자지구 최남단 도시 라파 대상 시가전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라파에는 100만 명 안팎의 피란민이 몰려 있다. 네타냐후 총리와 함께 체포 대상이 된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은 이날 자국을 방문한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라파 군사 작전 확대가 하마스 소탕 노력의 일부임을 재차 강조했다고 이스라엘 언론이 전했다.
전화위복도 가능해 보인다. 이번 영장 청구는 미국 의회의 ICC 검사장 제재 입법으로 번질 조짐이다. 공화당 소속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성명에서 “ICC 문책을 위해 의회가 할 수 있는 일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제에 미국 공화당을 우군으로 확보해 압박당하기만 하던 구도를 바꿔 보려는 네타냐후 총리의 심산도 감지된다. 로이터통신은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외교·안보 분야 참모들이 이날 이스라엘에서 네타냐후 총리와 만났다고 보도했다.
반면 바이든 대통령은 대가가 크다. 라파 진격을 강행하면 공격 무기 지원을 끊겠다는 엄포로 이스라엘과 거리를 벌려 겨우 붙잡아 둔 무슬림·진보 지지층을, 네타냐후 총리를 감싼 이번 일로 다시 놓치게 생겼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바이든이 모호한 태도를 유지할 경우 친이스라엘 민주당 지지자는 트럼프에게로 돌아서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세가 못마땅한 청년층은 기권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자칫 양쪽 모두의 외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