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전성이냐, 신중함이냐. 이란의 차기 지도자가 선택에 직면했다.”
헬기 추락 사고로 현직 대통령과 외무장관을 한꺼번에 잃은 이란의 향후 외교 정책, 특히 대(對)미국 전략을 두고 20일(현지시간) 미 뉴욕타임스(NYT)가 내린 진단이다. 이란의 대미 노선은 중동은 물론 세계 정세에도 큰 판도 변화를 가져오는 변수라는 점에서 초미의 관심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19일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사망에 따른 이란 외교 정책 변화와 관련해 주목할 지점은 △가자지구 전쟁 관련 입장 △이스라엘과의 갈등 △핵 개발 프로그램 등 세 가지다.
현재로선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란에서 대통령은 ‘2인자’이고, 권력 서열 1위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건재한 탓이다. WSJ는 “라이시는 하메네이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며 “그의 죽음이 이란의 정치적 진로를 바꾸거나, 미국과의 관계에 유의미한 변화를 촉발하지는 않을 듯하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라이시 대통령은 ‘강경파’로 분류되기는 했으나 대미 관계에선 절묘한 줄타기를 해 왔다. 미국과의 간접 소통 채널을 유지하며 직접 충돌은 피해 왔다. 핵 개발에 있어서도 ‘폭탄 제조’ 직전 수준에서 멈췄다. 중동 전문가인 데니스 로스는 NYT에 “하메네이와 라이시는 협상하되 타협하지 않고, (적을) 타격하되 선은 넘지 않았다. 정권을 위협할 수준으로 미국과의 갈등이 번지길 원하지 않았고, 이는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후임 대통령도 종전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다음 달 28일로 잡힌 대통령 보궐선거는 변수다. 예상하기엔 이른 시점이지만 이란 혁명수비대(IRGC)와 가까운 강경파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모하마드 모흐베르 수석 부통령 등이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다. 이와 관련,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란 신정 체제에 충성하는 강경파 간 정치적 경쟁이 격화할 수 있고, 이들 내부 결속력의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짚었다. 권력 투쟁 때문에 ‘강경 노선’이 심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개혁 성향 분석가인 사이드 라일라즈는 “라이시의 죽음은 이란 정치의 전환점이 될 수 있고, 정치가 더욱 경직되는 새 국면이 닥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이와 별도로, 영국 가디언은 “(라이시 대통령과 함께 숨진)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외무장관을 잃은 것도 이란의 외교 및 대외적 영향력에 실질적 여파를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은 신중한 모습이다. 매슈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라이시 대통령 등의 사망에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이날 라이시 대통령을 “자기 손에 피를 잔뜩 묻힌 사람”이라고 규정하며 “이란의 역내 안보 저해 행위에 대해선 책임을 계속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테헤란의 도살자’로 불린 라이시 대통령의 인권 탄압 전력을 감안하면서도 이란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격을 낮춰 애도 성명을 내는 절충안을 택한 셈이다.
이란 국영 IRNA통신은 이날 ‘기술적 결함’이 19일 발생한 헬기 추락 사고 원인으로 지목됐다고 보도했다. 이란 내에서는 해당 헬기가 1968년 초도 비행을 한 미국산 ‘벨-212’ 기종이고, 미국의 제재 때문에 정비 부품 조달을 제대로 못 했다는 점을 근거로 라이시 대통령 사망 책임을 미국에 돌리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