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직구로 피규어 못 사나요?"… 정부 규제에 키덜트족 뿔났다

입력
2024.05.19 07:00
6월 중 KC 없는 80개 품목 직구 금지 
유아용품·전자기기·생활제품 등 제한  
"피규어 못 사나" "미국 유모차 못 사" 
유승민 "안전 내세운 무식한 정책" 비판

정부가 국가 안전 인증(KC)을 받지 않은 제품에 대해 해외 직접구매(직구)를 규제하겠다고 예고하자 소비자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정치권도 해외 직구 규제는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한다고 비판에 가세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

직구 규제에 "더 비싸게 사라고?" 분통

19일 각종 취미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정부의 해외 직구 규제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한 피규어·키덜트(어린이 감성을 중시하는 어른) 네이버 카페에 글을 올린 누리꾼은 "직구하는 이유가 국내에 원하는 물건이 없거나 저렴하게 구매하기 위함인데, KC 인증 물건만 허용된다면 판매가는 늘 그랬듯 업체 마음이 된다"며 "비싸더라도 구매하거나 중고로 구매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지난 16일 다음 달부터 어린이제품 34개 품목, 전기·생활용품 34개 품목, 생활화학제품 12개 품목 등 80개 품목에 대해 해외 직구 시 '안전 인증'을 의무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알리익스프레스나 테무 등 중국 이커머스 업체를 통한 해외 직구가 늘면서 일부 제품에서 발암물질 등이 검출돼 안전성 문제가 불거지자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다.

그러나 취미 활동이나 일상생활에서 합리적 소비를 위해 해외 직구를 이용했던 소비자들은 정부의 규제 강화 방침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컴퓨터 하드웨어 커뮤니티 '퀘이사존'에는 "해외에서 1만 원 하는 부품을 국내에서 4만 원은 주고 사게 됐다" "소비자들이 직구를 찾는 근본적인 원인인 국내 유통 구조는 바꾸지 않고 규제만 한다"는 불만이 나왔다. 배터리나 충전기 등 전자제품을 직구로 이용했던 전자기기 마니아들도 이번 조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유모차 등 유아용품을 해외 직구로 많이 구입하는 부모 반발이 거세다. 맘카페에서는 "수입 제품이 중국만 있는 것도 아닌데 미국이나 유럽 인증은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KC 인증만 인정하는 거냐" "국내에 유통이 안 되는 유모차를 해외 직구로 싸게 사는데 그건 왜 막냐" "애들 옷 절반 정도를 해외 직구로 이용하는데 어이가 없다" "국내 유아용품은 너무 비싼데 선택권을 제한한다" "저출생에 역행하는 규제" 등 성토가 쏟아졌다.

규제 반대 국민동의청원도 나왔다. 한 청원인은 '해외직구 자유를 보장해주세요'라는 제목으로 "정부는 안전을 이유로 수많은 제품의 해외직구를 금지하려 하지만, 국민 스스로 위험을 평가하고 선택할 자유가 있다. 국민을 과보호한다면 이는 국민 자유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청원인은 "해외 직구 관련 법 개정은 소비자에게만 부담을 전가하고 경쟁력 없는 업체들을 보호하는 데 그친다"고 지적했다.

다음 달 시행, 정확한 가이드라인 없어

정부는 소관 부처 준비를 거쳐 다음 달 중 시행하겠다고 밝혔지만, 정확한 시행일자와 세부 가이드라인이 불분명해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회원 약 5,700명의 다이캐스트 모형(주물 공법으로 만든 모형) 수집 동호회 카페에서는 이미 해외 플랫폼에서 예약 구매한 물건을 받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봉제 인형 구매가 취미인 이들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관세청에 물어보니 인형은 완구류에 들어가서 규제 품목이고, 물품 권장 연령대는 상관없다고 하는데 직구가 불가능해지는 거냐"고 토로했다. 가령 같은 피규어라도 성인용 제품은 단속 대상이 아니지만 만 13세 이하 사용 제품은 위해성이 확인되면 제품 반입이 차단된다는 얘기다.

관세청은 각 부처와 협의해 직구 제한 품목을 고지할 방침이다. 관세청 관계자는 "세부 항목 반입 여부는 국가기술표준원과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에서 정한다"며 "해외 직구 원천 금지 관련 법 개정 전 차단 품목 리스트를 받아 6월부터 해당 품목을 제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승민 "무식한 정책" 한동훈 "과도한 규제"... 정부 진화 나서

정치권도 비판했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18일 자신의 SNS에 "안전을 내세워 포괄적, 일방적으로 해외 직구를 금지하는 것은 무식한 정책"이라며 "KC 인증이 없는 80개 제품에 대해 해외 직구를 금지하겠다는 정부 정책은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유해성이 입증되면 국산이든 외국산이든 유통을 금지하고 제조사에 책임을 묻는 건 당연히 필요한 사회적 규제이지만, 유해성 입증과 KC 인증 획득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소비자에게 또 다른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규제는 필요한 곳에만 정확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같은 날 자신의 SNS에 "개인 해외 직구 시 KC 인증 의무화 규제는 소비자의 선택권을 지나치게 제한하므로 재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전 위원장이 지난달 총선 참패 책임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정부 정책 현안에 목소리를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 전 위원장은 "해외 직구는 이미 연간 6조7,000억 원을 넘을 정도로 국민이 애용하고 있고, 저도 가끔 해외 직구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내 소비자 보호를 위해 제품의 안전을 꼼꼼히 챙기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책무"라면서도 "16일 발표처럼 개인의 해외 직구 시 KC 인증을 의무화할 경우 그 적용 범위와 방식이 모호하고 지나치게 넓어져 과도한 규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반발 여론이 커지자 정부는 "80개 품목 전체에 대해서 해외 직구가 당장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 달 중 실제로 위해성이 확인된 제품의 반입을 차단할 계획"이라고 진화에 나섰다.

김소희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