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을 맞은 A씨는 건강검진 중 손가락 끝에서 피 한 방울을 뽑아 인공지능(AI) 정밀검사를 받았다. 결과를 본 A씨는 깜짝 놀랐다. '치매를 일으키는 RNA(리보핵산) 5종류가 기준치 이상 검출됐습니다. 약 15년 뒤 치매가 발병할 확률이 약 80%입니다.' 의료진은 A씨의 건강 상태를 고려한 약을 처방할 테니 걱정 말고 귀가할 것을 권했다. 2주 뒤 A씨 집으로 약이 배송됐다. 설명서에는 '고객님을 위한 맞춤 RNA 약입니다. 치매 발병 확률을 크게 낮출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바이오 업계와 생명과학자들이 꿈꾸는 미래의 치매 검사 장면이다. 간단히 피만 뽑아 RNA를 확인하면 치매 발병 확률을 알 수 있는 기술이 상용화할 거라는 기대가 그 근거다. 지금은 치매를 진단하거나 발병 가능성을 알아볼 때 뇌 영상을 찍거나 요추(허리뼈)에 바늘을 찔러넣어 뇌척수액을 뽑는다. 뇌 신경세포가 얼마나 손상됐는지, 뇌에 특정 단백질이 비정상적으로 쌓였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인데, 영상 촬영은 비싸고 뇌척수액 검사는 아프다. 반면 RNA 검사는 비싸지 않고 통증도 적을 것이다.
이런 기대가 가능해진 데는 코로나19 대유행이 한몫했다. 코로나 백신으로 RNA의 질병 예방 가능성이 확인된 덕분에 진단과 치료 영역까지 넘볼 수 있게 됐다. 전문가들은 RNA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미래 제약산업은 물론 의료체계에도 적잖은 변화가 생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기적의 치매 치료제'라고 불리는 신약 '레켐비'가 지난달 국내에서도 허가를 받았다. 치매로 생긴 인지기능 저하 증상을 27% 줄여주는 이 약은 미국에 이어 일본, 중국에선 이미 사용 중이다. 레켐비는 치매의 원인이 되는 뇌 속 특정 단백질을 제거한다. 이 과정이 워낙 강력해서인지 뇌부종과 뇌출혈 같은 심각한 부작용이 보고돼 있다. 만약 치매 원인 단백질이 생긴 뒤에 제거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만들어지지 않게 하면 어떨까. 치매 발생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으니 굳이 부작용을 감수해야 할 약도 필요 없을 것이다.
체내에서 특정 단백질을 만드는 물질이 다름 아닌 RNA다. 디옥시리보핵산(DNA)의 유전정보를 복제해 그에 맞는 단백질을 생성하는 역할을 한다. 치매의 원인이 되는 특정 단백질도 특정 RNA가 만든다. 이 RNA가 체내에 얼마나 있는지 검사하면 치매 원인 단백질이 얼마나 생길지, 즉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RNA를 모두 찾아내 없앤다면 치매의 원인을 제거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어떻게 해당 RNA만 콕 집어 제거할 수 있을지는 해결해야 할 난제다.
이런 RNA 기술을 이용하면 이론적으론 어떤 단백질이든 제거할 수도, 생성할 수도 있다. 인체에 존재하는 단백질은 2만1,688가지로 알려져 있다. 이 중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건 현재까지 3,000여 개이고, 이들이 대개 약 개발에 활용된다. 질병은 불필요한 단백질이 만들어지거나, 필요한 단백질이 만들어지지 않을 때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단백질도 어떤 질병과 관련 있는지, 어떤 RNA가 만드는지를 알면 모두 예방이나 치료용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김빛내리 기초과학연구원 RNA연구단장(서울대 생명과학부 석좌교수)은 "20~30년 뒤면 RNA를 기반으로 대부분의 질병 원인이 밝혀지고, 신약의 절반 이상을 RNA 치료제가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당수 질병을 RNA 기술로 간편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의료체계는 지금처럼 치료 중심이 아닌 예방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바뀔 수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임상시험 단계에 진입한 RNA 기반 신약 후보물질은 2019년 76건, 2020년 80건에서 2021년 135건으로 크게 늘었다. 지난해 말 기준 165개의 후보물질이 임상시험 중이다. 2020~21년 사이에만 세계 시장에서 RNA 기술 관련 인수합병(M&A) 규모가 11배나 늘기도 했다. 시장조사업체 글로벌 마켓 인사이트에 따르면 RNA 치료제 시장 규모는 지난해 192억 달러에서 2032년에는 311억 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코로나19 대유행 당시 사람들은 RNA란 용어에 익숙해졌다. 글로벌 제약사 화이자와 모더나 코로나 백신의 주성분이 mRNA였기 때문이다. RNA는 세부 형태나 기능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뉘는데, mRNA는 그중 하나다. 유전정보를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m이 붙었다. 코로나 백신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진 것과 똑같은 단백질을 만드는 mRNA였다. 이걸 맞으면 우리 몸은 바이러스가 들어온 걸로 착각하고 싸울 준비를 했다. 모더나는 코로나 종식 이후 이 기술을 대상포진, 흑색종, 유방암 등 여러 질병에 응용하는 중이다. 가령 암세포를 공격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mRNA로 항암제를 개발하는 식이다. 이 외에도 여러 종류의 RNA(siRNA, miRNA 등)가 신약 후보물질로 개발되고 있다.
RNA는 혼자서 단백질을 만들지 못한다. 주변 다른 생체 물질들의 도움을 받는다. RNA를 돕는 물질 중 하나가 안티센스 올리고뉴클레오티드(ASO)로, 단백질 생성 과정에 생기는 오류를 수정하는 역할을 한다. 2016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세계 첫 척수성 근위축증 치료제로 승인한 신약 '스핀라자'의 주성분이 바로 ASO다. 스핀라자는 출시 2년 만에 매출 17억 달러를 올렸다. ASO를 기반으로 RNA 신약을 개발 중인 미국 바이오기업 아이오니시스 테라퓨틱스의 김태원 부사장은 "중추신경계와 근육 관련 RNA 신약이 먼저 나오고, 약 10년 뒤에는 항암제 탄생도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RNA는 그러나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효소에 의해 금방 파괴된다. 그래서 체내 필요한 곳에 '무사히' 도달해 충분한 약효를 발휘하게 만들려고 다양한 기술이 시도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전달체다. 지질이나 단백질, 독성을 제거한 바이러스 등을 전달체 삼아 그 안에 RNA를 넣어 몸 속으로 들여보내는 것이다. RNA를 뇌 안으로 전달하는 새로운 기술로 치매 신약을 개발 중인 바이오오케스트라의 윤일상 전무는 "안정적이면서 정확한 전달체만 갖춰지면 RNA 신약 발전 속도는 혁신적으로 빨라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RNA를 변형해 파괴를 늦추는 기술도 있다. 기다란 실처럼 생긴 RNA의 양끝을 붙이거나(원형RNA), 양끝에 매듭을 짓는(올가미 RNA) 것이다. 이런 기술에 특허를 갖고 있는 김윤기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교수(라이보텍 대표)는 "중·장기적으로 어떤 모양의 RNA가 치료제의 표준이 될지는 약효는 물론 생산성과 경제성 모두를 감안해 정리될 것"이라며 "전달체 없이 잘 디자인된 RNA만 세포 안으로 넣어 단백질을 생성하는 기술이 다가오고 있다"고 예고했다.
아예 RNA 자체를 편집하는 시도도 시작됐다. RNA가 전달하는 유전정보를 바꿔 원하는 단백질이 만들어지게 유도하는 것이다. 빛을 비출 때만 RNA가 편집되는 기술을 개발 중인 허원도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교수는 "10~20년 후 암이나 치매 치료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명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인체는 끊임없이 단백질을 만든다. RNA가 생애 전 주기에 걸쳐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과거엔 유전질환이나 중증질환에 RNA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주로 연구돼 왔다면, 최근 들어선 발달 단계나 정신질환에 대한 RNA의 영향력도 주목받고 있다. 예를 들어 영·유아기 자폐 스펙트럼, 청소년기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청·장년기 게임이나 마약 중독, 노년기 퇴행성 뇌질환에 RNA의 역할이 입증되고 있다. 임혜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기능연구단장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RNA 치료제의 잠재력은 더 폭발적일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