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재생에너지의 중요성이 높아지는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이른바 '녹색 반도체 경쟁'에서 대만과 일본에 뒤처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국가 경제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글로벌 무역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좀 더 전략적으로 재생에너지 인프라 구축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산하 '탄소중립 산업정책연구소(Net Zero Industrial Policy Lab· NZIPL)'는 12일(현지시간) 발표한 '신냉전 시대, 한국에 주어진 기회와 리스크: 자동차, 배터리, 반도체 공급망 분석' 보고서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 연구소는 산업 부문별 공급망에 대한 기술적 분석과 주요국 산업 정책을 통합 분석하는 정책 싱크탱크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 한국의 주요 수출 품목 공급망 및 주요국 산업 정책을 살펴봤다.
보고서는 미중 갈등, 글로벌 공급망 변화에 더해 최근 주요국이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보호무역주의적 산업 정책을 도입하면서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등을 앞세운 수출 주도형 한국 경제가 상당한 위협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으로 이뤄진 반도체 산업에 직접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전기를 쓰고 그로 인한 탄소 배출을 줄이는 과정에서 재생에너지를 이용한 '녹색 반도체' 생산 압박이 점점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들이 재생에너지 확보에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경쟁 회사들에 밀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국내 대표 반도체 업체인 두 기업은 2050년까지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쓰자는 글로벌 캠페인 'RE1001 이니셔티브'에 가입했지만 정작 2030년 중반까지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턱 없이 모자란 상황이다.
본보가 김경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한국전력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RE100에 가입한 국내 32개 기업은 2022년 5만6,338기가와트시(GWh)에 달하는 전력을 썼다. 이 중 삼성전자의 2022년 전력사용량은 2만1,731GWh, SK하이닉스의 전력사용량은 1만41GWh로, RE100 가입 기업 중 전력 사용량이 가장 많은 1·2위 기업이었다. 반도체 산업은 24시간 공장을 돌려야 하는 데다 첨단 공정일수록 전기가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2022년 국내 전체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5만406GWh로 전체 발전량의 8.1%에 그쳤다.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재생에너지 확보를 통해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TSMC는 2050년 재생에너지 100% 달성 목표를 2040년으로 10년이나 앞당겼다. 뿐만 아니라 2020년 덴마크 풍력 기업 오스테드와 세계 최대 규모 해상풍력 전력 구매 계약을 맺은 데 이어 지난해 대만 기업 'ARK 에너지'와 2만GWh에 달하는 태양광 전력을 20년 동안 공급받기로 했다. TSMC는 일본 정부로부터 파격적 지원을 받고 규슈에 들어선 TSMC 구마모토 공장을 100% 재생에너지로 가동한다고 알렸다.
보고서는 새로운 반도체 생산 시설 입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재생에너지가 주요 요인이 됐지만 한국에선 재생에너지 확보가 어려워 최첨단 반도체 시설 투자를 유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연구소 공동 책임자인 팀 사하이 박사는 "한국은 정부의 성공적 산업 정책을 바탕으로 정치적, 지정학적 변화에 대응해 왔다"면서도 "현재 에너지 전환에 대한 (정부의) 정치적 지원은 취약한 상태라 산업과 에너지 전환을 통합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