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분만이라도 휴대폰 전원을 끄고 멍을 때려보고 싶어요."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반포한강공원에서 만난 진상준(35)씨는 잔뜩 들뜬 표정이었다. 대구에서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는 그는 평소 주문 알림 때문에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한다. 그래서 무려 35대의 1의 경쟁률을 뚫고 '한강 멍때리기 대회'에 출전했다. 진씨는 "우승 욕심은 없다"면서도 "바람이 많이 불어 머리가 날리는데 멍을 잘 때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미소지었다.
10주년을 맞은 한강 멍때리기 대회는 올해도 어김없이 성황을 이뤘다. 초등학생부터 60대 어르신까지 수많은 시민이 모여 누가 더 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겨뤘다. 예술점수를 의식해 한복, 작업복, 인형탈, 마법사 분장 등 저마다 개성 넘치는 차림으로 대회에 임했다.
서울시는 이날 오후 3시부터 한강 잠수교에서 무념무상 고수를 가리는 '2024 한강 멍때리기 대회'를 개최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무가치하다는 선입견을 깨기 위해 2015년 시작된 행사다. 출전 시간은 90분이며 15분마다 참가자들의 심박수가 측정된다. 심박수 그래프가 안정적이거나 하향 곡선을 그릴수록 좋은 평가를 받고, 우승자는 구경하는 시민들의 응원 투표 결과를 종합해 결정된다. 구경꾼을 합쳐 2,5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잠수교 아래서 이 엉뚱한(?) 대회를 지켜봤다.
10년의 대회 관록을 반영하듯, 참가자 면면도 화려했다. 데이터 언어학자, 항공정비사, 소방공무원 등 다양한 직군을 망라했고, 쇼트트랙 국가대표를 지낸 곽윤기씨도 의욕 가득한 표정으로 대회 시작을 기다렸다. 시는 신청 사연을 검토해 80개 참여팀을 선정했다. 게임회사에 다니는 김형도(32)씨는 "아무 전략이 없는 게 전략"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강승균(62)씨는 "60대가 되면서 하나 둘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고 참가 이유를 밝혔다.
휘슬과 함께 대회가 시작되자 참가자들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싹 가셨다. 눈의 초점을 흐리게 한 채 본인만의 방법으로 멍때리기에 몰두했다. 요가 매트에 눕고, 가져온 인형과 시선을 맞추는가 하면, 악기를 끌어 안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수면과 잡담은 금지됐으나 네 가지 색깔이 표시된 카드를 들어 물, 마사지 등을 요청하거나 각종 불편사항을 알리는 의사 표시가 가능했다.
90분이 지나고 드디어 우승자가 가려졌다. 1등은 평소 멍때리기 연습을 착실히 한 권소아(36)씨에게 돌아갔다. 본인을 아나운서, 외국어 강사 등 여러 직업을 가진 '프로 N잡러'로 소개한 권씨는 독일어로 "오늘 상을 받아서 기분이 좋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평소에도 멍을 때리느라 지하철 환승 구간을 놓칠 때가 있다"면서 "이번 주엔 연습을 위해 출퇴근할 때 더 멍을 때렸다"고 우승 비결을 전했다.
전문가들은 멍때리기가 그저 그런 이벤트가 아니라고 말한다. 외부 자극에서 벗어나 안정을 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멍때리기는 한 곳을 응시하면서 다른 자극을 배제해 일시적으로 심신을 안정시킨다"며 "특히 짧은 시간 반복적 영상을 자주 시청하는 젊은 세대에게 일종의 '도파민 디톡스'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김희진 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도 "무념무상은 과하게 움직이는 뇌를 정상적인 휴지 상태로 돌려준다"면서 "뇌의 용적을 넓혀줘 기억력과 집중력을 향상하는 효과도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