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면역력, 다양한 아픔 겪어야 더 강해진다

입력
2024.05.13 04:30
25면
건강·상담: <5> 면역체계에 대한 고찰

편집자주

인생 황금기라는 40~50대 중년기지만, 크고 작은 고민도 적지 않은 시기다. 중년들의 고민을 직접 듣고, 전문가들이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면역의 핵심은 자기를 잘 아는 것
이물질 기억해 무리 없이 신체 보호
다양한 자극, 새로운 경험해야

최근 면역체계 이상으로 고생 중인 50대 중년 환자가 느닷없이 자녀 이야기를 털어놨다. 자녀가 “‘나답게 살고 싶어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래요’라며 고집을 부린다”는 내용이었다. 최근 청소년 선호 직종 중 하나가 ‘유튜버’임을 봐도, 남의 눈치나 간섭 없이 창의적으로 사는 경향이 대세 임은 분명해 보인다.

2000년대 초 ‘자기답게 살기’를 강조한 일본 세대를 조명한 책 ‘하류 사회’(미우라 아츠시 저). 당시 일본에서는 중고교 시절 ‘나만의 개성’을 강조한 풍토가 강했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해 좋은 학교ㆍ직장에 가도 미래 생활에는 차이가 없다’ ‘다른 사람이나 사회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다’ 등의 정서가 지나치면, 반대로 현실 감각이 약해진다. 실제로 일본엔 20~30대 중반이 되도록 정규직을 거부하는 ‘프리터족’(Free+Arbeiter+族)이 만연했다. 하지만 이후 그들이 중년이 되면? 젊은 시절 나만의 개성을 찾아 ‘소득 상승’의 기회는 포기했기에 경제 수입이 적을 확률이 높다. (물론, 자신의 뜻을 좇아 크게 성공한 이들도 있다.) 지금은 40대가 훌쩍 넘었을 일본의 기성 세대들은 과연 ‘파랑새’를 찾았을까? 비율은 얼마나 될까?

‘면역체계’에 빗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주민센터에 가서 인감을 발급받으려면 반드시 주민등록증으로 자신임을 증명해야 한다. 내가 나의 실체이지만,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은 ‘주민등록증’이라는 플라스틱 한 장이 하는 셈이다. 면역학은 이런 자기 증명에 관심을 두는 학문이다. 그리고 내 신체 면역 체계에서 주민등록증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HLA 항원’이다.

몸을 지키는 ‘최전방 군인’ 대식세포(大食細胞ㆍMacrophage)는 세균이나 박테리아 등이 침입하면 이를 갈기갈기 찢어 잡아먹는다. 그리고 남은 파편을 HLA 항원의 바코드에 기록한다. ‘국방부’에 해당하는 흉선 속의 T세포(헬퍼 T세포)는 HLA 항원의 바코드를 토대로 아군과 적군을 식별한 뒤, 다른 T세포나 B세포에 싸울지 말지 명령한다. 이 싸움이 바로 ‘면역 반응’이다. 바이러스를 알아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님을 알고 면역 반응을 일으켜 나를 지키는 것이다. 면역의 핵심은 자기를 잘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 T세포가 피아(彼我ㆍ자기와 비자기)를 식별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HLA 항원은 대식세포가 먹어 치운 세균이나 바이러스 자체를 기억하진 않는다. 대신, 이전에 침입한 적이 있었던 이물질의 찌꺼기로 모습을 바꾼다. 애초 ‘홍길동’이었던 바코드가 ‘홍길동 S’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이물질을 기억하는 것은 몸에 무리를 주지 않도록 하는 신체 면역 반응의 지혜다.

이런 면역 반응은 언뜻 불교와도 통한다. 마침 부처님오신날(5월 15일)을 앞두고 있으니, 불경의 한 구절을 짚어봐도 좋겠다. 불교 최고 경전 '반야심경'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로 시작한다. 이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에서 ‘관’은 지금 현재의 ‘자기’를 관찰한다는 의미이고, ‘자’는 자아를 가리킨다. 보살은 보리살타, 즉 ‘지혜가 존재함’을 뜻한다. ‘나를 이모저모 입체적으로 관찰하는 곳에 위대한 지혜가 존재한다’로 요약된다. 황새가 사냥감을 노릴 때도 사냥감 주변의 환경을 입체적으로 바라본다고 한다. 앞뒤 재지 않고 덥석 달려들면 반드시 실패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면만 보려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자신이 바라보는 한쪽 면에 모든 가치를 두고 집착한다. 코가 막힌 사람은 코만,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눈만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모두가 같은 가치를 가진 전체 중의 하나일 뿐이다. 앞서 T세포도 과거에 침입해 이미 ‘자기화’돼 있는 특정 바이러스ㆍ세균 정보를 이모저모 관찰한 뒤 자기가 아님을 파악해 면역 반응을 지시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몸의 면역계는 이물질을 손쉽게 알아서 인식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관자재보살’ 같은 면역학의 메커니즘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현대인의 대표적인 질환으로 지목된 ‘자가 면역 질환’도 이런 면역학의 실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자기를 아는 것이 핵심인 것을 밝혀냈다.

2000년대 초반 일본 사회가 그랬듯, 최근 일부 한국 젊은이도 ‘자기’나 ‘나만의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자기’라는 것은 사실 10~20년 정도 쌓인 젊은 세대의 경험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적응의 결과물이다. 이 결과물을 토대로 ‘자기의 생각’만 절대시하고 새로운 경험과 적응을 경시한다면, 그 자아는 현재 ‘프리터족’으로 살아가는 일본 40ㆍ50대 중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자극에 노출돼 새로운 경험ㆍ적응을 한 면역계가 그렇지 않은 사람의 면역계보다 훨씬 더 건강한 것과 같은 이치다.

중년 건강도 마찬가지다. 자기만의 경험,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놓은 사고와 루틴에 안주하면 발전이 없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붓다)이 되고자 세상을 두루 살피면서 고행했다. 중년의 면역계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새로운 경험이 필요하다. 불교의 자아와 면역학의 자기가 통한다고 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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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한의학 박사ㆍ전 대구한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