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이 열었다가 속절없이 붙들렸다. 지난달 25일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되었던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기자회견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아마도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녀와 소주 3병을 마신 것 같다든가 이런 콘텐츠를 공짜로 봐서 미안하다든가 하는 댓글이 상위권에 링크되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이후 쏟아진 미디어상의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이 사태를 케이팝의 산업적 이해관계와 연결해 해석하는 시각이다. 4월 말부터 시작된 하이브의 민희진/어도어에 대한 언론 플레이와 이에 대한 설명 혹은 항변 형식으로 기획된 민 대표의 기자회견에 이르기까지 갈등의 노출이 하이브와 어도어의 시가 총액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런저런 입방아라든지 케이팝의 미래에 대한 염려가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이 사태가 한국 기업의 가부장적 구조와 문화를 보여준다고 보는 시각이다. 민 대표는 남성 경영진을 ‘개저씨’라고 지칭하며 ‘내가 니네같이 기사를 두고 차를 모냐, 술을 마시냐, 골프를 치냐’고 ‘항변’했는데 이에 대한 공감이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급속히 번져나갔다. 업계는 다르지만 일하는 여성으로서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다며 밈을 전파하고 ‘어록’을 공유하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나 또한 처음에는 민 대표의 노골적일 정도로 솔직한 표현들에 귀를 의심하며 볼륨을 높였지만 이후 두 시간을 넘긴 기자회견의 말미에 이르러서 든 생각은 아이돌이라는 ‘인간 상품’을 기획, 생산, 판매하는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녀는 뉴진스 멤버들과 영혼을 나누는 깊은 사이이며, 하이브의 다른 레이블 소속 걸그룹이 뉴진스의 이미지와 댄스를 ‘베낀 것’은 뉴진스를 ‘기성품’으로 만드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모든 아이돌 또한 기성품으로 만들어버리기에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살아있는 인간 소녀들에 대한 애정과 그 소녀들이 자신의 모든 창조적 능력을 ‘갈아넣어’ 만든 노동 생산물이기도 하다는 자부심을 오가는 민 대표의 언어는 케이팝이 당면한 딜레마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돌은 ‘사랑’으로 지탱되는 존재들이다. 아이돌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지만 그게 주업은 아니다. 그들의 주업은 팬들로 하여금 사랑과 애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또한 팬들은 아이돌의 퍼포먼스와 퍼포먼스가 담긴 앨범 등의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증명한다.
흔히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찬미되지만 모든 사랑이 그렇지는 않다. 아이돌 팬들의 사랑도 그 중의 하나였다. 애초 ‘광신자(fanatic)’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는 팬들의 사랑은 이해되지 않는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는데 아이돌 그룹을 대상으로 한 십대 여성들의 사랑은 더 그랬다. 한국 사회는 이들에게 ‘빠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빠들을 쫓아다니는 어린 여자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멸칭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쓰였다. 그렇지만 흔히 3대 메인 기획사로 불린 SM, JYP, YG를 중심으로 아이돌 아티스트 인하우스 시스템(아이돌 그룹의 멤버 선발, 훈련, 데뷔, 활동을 한 기획사 내에서 모두 소화하는 시스템)이 갖춰지고, 이제는 ‘전설’이 된 여러 아이돌 그룹을 배출하고, 아시아 지역에 한정되었던 한류를 글로벌 문화상품으로 변모시킨 자양분은 팬들의 사랑, 그리고 그에 기반한 구매와 팬 활동이었다.
팬들의 사랑이 멸칭으로 불리지 않게 된 것은 아이돌이 무시 못 할 ‘수출 상품’이 되면서부터였다. 특히 서구권에서의 인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10년대 중반부터 미국을 위시한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은 BTS의 팬들을 일컫는 ‘아미(ARMY)’는 케이팝 팬의 대표적인 명칭으로 떠올랐다. BTS의 글로벌 팬 집단인 ‘아미’에는 ‘빠순이’에 부여된 비하와 경멸의 감정이 없다. 오히려 이들은 글로벌 문화산업이 미국 중심의 서구에서 한국을 비롯한 비서구로 확장, 이동하는 현재를 포착한, 열정적이고 세련된 새로운 문화 소비 집단으로 여겨진다.
국내에서는 ‘빠순이’들이 성장해 다른 장르의 문화에도 기꺼이 지갑을 열게 되면서 그 문화가 산업으로 몸집을 불려나가게 되었다. 뮤지컬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출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팬덤의 확보는 도대체 어느 정도가 팔릴지를 예측하기 어려운 문화 상품의 성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사랑만이, 화폐를 통해, 문화를 구원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어떤 ‘빠순이’들은 화폐를 통해서 사랑을 입증하는 데 만족하지 못 했다. 이들은 자신이 사랑한 바로 그 장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노동으로 사랑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문화의 시대 아니었던가. tvN 초기 대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은 이런 사례를 서사화해 인기를 끌었다. 아이돌 1세대 보이그룹 H.O.T.의 열광적인 팬이었던 여주인공 성시원은 팬픽으로 대학을 가고 이후 방송작가로 일하게 된다. 최근에는 지상파 및 케이블 방송사에서 신입 직원을 거의 채용하지 않게 되면서 이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에게 아이돌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복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꿈의 직장이 되었다. 자신의 취향과 사랑과 노동을 일치시킬 수 있는 직업이 어디 흔한가 말이다.
아이돌을 사랑한 팬이었던 이들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진입할 때 가장 큰 ‘스펙’은 팬덤 경험이다. 팬 활동을 노동자로서 갖춰야 할 자원으로 이전시킬 때 이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질은 일을 단순한 일이 아니라 사랑과 꿈의 실현으로 대하는 자세다. 아이돌을 사랑했듯이 아이돌과 함께하는 이 일을 사랑으로 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사랑은 보다 미묘한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아이돌 제작 시스템이 정교해질수록, 관련 타 산업으로의 확장이 보다 중요해질수록, 개인 인간으로서 아이돌들이 갖는 고유성은 그 아우라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아이돌과의 차별성 속에서 소비 가능한 개성이 되어야 한다. 독특해야 하면서도 너무 독특해서는 (소비되지 않으므로) 안 되는 것이다. 최근까지도 케이팝에서 유행한 세계관이니 서사니 캐릭터니 하는 것들은 바로 이를 위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특히 소셜미디어의 적극적이고도 광범위한 활용은 이를 더욱 북돋운다. 그러니 이제 아이돌 산업 종사자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은 어떤 아이돌의 고유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그 고유성을 특정한 모드로 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 에너지인 것이다.
민희진 대표는 자신이 아이돌 팬이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그들과 함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뉴진스 데뷔 과정을 ‘출산의 산고’에 비유하고 멤버들을 ‘내 새끼들’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이것이 다른 상품과 아이돌 상품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상품화된다고 하더라도 아이돌은 원래 인간이다. 피와 살과 감정이 있는. 기획자와 아이돌 간에 서로가 어떤 감정을 갖게 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민 대표의 기자회견을 지켜본 뒤 하이브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글로벌 복합 엔터테인먼트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기업’이 하이브의 비전이라고 한다. 다양한 전시판매대(platform!) 규격에 맞게 모드화한 케이팝 아이돌들과 관련 산업들이 우리의 생활양식(lifestyle!) 전반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 하이브가 그리는 미래인 셈이다. 한때 비하와 경멸의 대상이었던 ‘빠순이들의 사랑’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환상적인 순간이 도래하려는 것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고유성에 대한 감정이며, 그렇기에 모든 가치를 숫자로 환원하는 시가 총액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