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경기 시작 전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데, 외국인 선수가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다른 외국인 선수는 그저 덤덤히 서 있었다. 외국인이 타국의 국가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게 신기했지만, 선글라스를 쓴 채 한국 선수들이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모습도 신기해 보였다. 예전엔 그랬으면 혼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글라스를 쓰든 안 쓰든 국기에 대한 예를 갖추면 그만이겠지만 같은 모습을 놓고 예전엔 ‘틀리다’고 말했을 것 같은데, 요즘엔 ‘다르네’라고 얘기하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어릴 때 기억을 되짚어보면 ‘틀리다’는 표현을 많이 썼던 것 같다.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면 “그건 틀려”라고 했고, 주변에서도 ‘다르다’보다는 ‘틀리다’를 더 많이 쓰던 시대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라고 하는 게 맞아”라고 종종 지적했던 것 같다.
응원하는 팀이 큰 점수를 내주고 끌려가는 경기를 해서일까. 왜 예전에는 틀리다는 말을 더 많이 썼을까로 생각이 이어졌다. 딱히 생각나는 근거나 이론은 없지만 우리의 현대사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6·25 전쟁으로 공산주의 민주주의로 갈라서 동족 간에 서로 죽이고 죽는 사건이 있었고, 권위주의 정권 치하에서 수십 년간 살아오면서 이를 타파하기 위한 민주화 과정을 겪으며 우리 편 아니면 남의 편으로 여겼을 것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시대에는 다른 것은 인정받을 수 없었고, 상대가 틀렸어야만 마음 놓고 공격하고 배척하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어중간하면 박쥐, 회색분자로 분류될 수 있고, 선명한 색깔을 가져야만 든든한 우리 편으로 여기고 같이 살아갈 수 있었으리라. 외부 민족이 적게 유입돼 한민족으로 살아온 긴 세월 동안 ‘다름’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았을 수도 있다.
이런 다름에 대한 위협과 불안감은 우리나라에서만 보이는 건 아니다. 수많은 공포영화와 외계인의 지구 침공 같은 SF 영화, 그리고 돌연변이가 등장하는 영화들의 기저에는 ‘나와는 다른 존재’에 대한 몰이해와 불안, 그리고 경계심 같은 것들이 깔려 있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극심하던 시대에 이런 영화들이 다수 제작되고 인기를 끌었다는 분석을 어디선가 본 거 같다.
최근 들어 정계와 법조계 등 사회 곳곳에서도 이런 구도가 적용되고 있는 것 같다. 사회 곳곳에서 최소한의 대화도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 대화나 협치는 말할 것도 없고, 다름을 인정하자는 건 ‘틀린’ 것으로 공격당하는 분위기다.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리 같은 영역에서도 상대성 이론이라는 게 있듯이 사람이 하는 일은 항상 맞지도 않고, 맞을 수도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점점 다른 걸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본다. 틀린 것은 분명히 틀렸다고 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서로가 다른 걸 인정하고 절충해서 같이 살아나갈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사법 영역에서조차 검찰과 법원 판단이 내 생각과 다를 때 틀린 것으로 치부하고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게 일상이 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검찰과 법원도 독단적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건 당연하다. 어쨌든 그들도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