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소 표 구하려고 싸우다 살인까지...'문명인'이란 무엇인가

입력
2024.05.0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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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성의 공연한 오후]
'권리'에 대해 질문하는 연극 '더 라스트 리턴'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두산아트센터는 2013년부터 시대적으로 의미 있는 주제를 정해 공연, 전시, 강연을 하는 두산인문극장을 운영한다. 올해의 주제는 '권리'다. 연극 '더 라스트 리턴'(연출 윤혜숙)은 올해 두산인문극장의 첫 공연이다.

무대는 극작가 오펜하이머의 '힌덴부르크로 돌아가다'라는 가상 공연의 극장 로비. 마지막 공연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취소 표를 기다린다. 신장이 좋지 않아 전체 공연을 보지 못한 오펜하이머 전공 교수(정승길), 이 연극을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고 따돌림을 당한 회사원(최희진), 전쟁 트라우마의 치유책으로 정신과 의사에게 이 공연을 보라고 제안받은 군인(우범진), 그리고 가방으로 자리를 맡아둔 채 카페에 간 소녀(최서희·최은영)가 기다리는 이들이다.

도착한 순으로 취소 표를 배정받는 게 간단하고 합리적인 룰이다. 그러나 가방만 두고 자리를 비운 소녀와 언어 소통이 어려워 보이는 소말리아인(이송아)이 원칙과 권리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킨다. 소말리아인은 네 번째로 왔지만 대기열의 제일 앞자리를 차지한 채 공연이 아닌 만날 사람을 기다린다고 주장한다. 서로의 사정을 안쓰러워하면서도 누구도 표를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겨우 표 한 장을 얻으려 상대를 비난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논리적 언변술의 향연이 펼쳐진다.

공연 시간이 임박할수록 공방이 몰상식하게 전개되고 지적인 언어 유희의 현장이 살육의 현장으로 바뀐다. 대기자들은 매표소 직원에게 중재를 요청하지만 번번이 자신의 업무가 아니라는 대답만 듣는다. 유일한 극장 관계자인 매표소 직원은 매뉴얼대로만 움직이며 사건을 방기하고 회피하며 파국을 앞당긴다. 위기 대응 매뉴얼이 필요할 때 정작 작동하지 않는 공적 시스템을 떠올리게 한다.

취소 표는 누구에게 돌아갔을까. 최후의 승자는 중요치 않다. 인간의 이기적이고 야만적인 본성을 드러내는 게 연극의 목적이다. 이를 통제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무기력한 시스템에 대한 풍자와 비판도 곁들여진다.

말싸움에서 몰상식 막장으로

작품 속 '힌덴부르크로 돌아가다'의 가상 극작가 오펜하이머는 핵무기 개발에 공헌한 과학자의 이름과 동일하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인류의 이성과 과학적 사고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다. 인간은 그릇된 신념과 확신으로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했다. 작품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잇따랐던 2차 대전 직후를 상기시킨다. '힌덴부르크로 돌아가다'는 2차 대전 발발 직전인 1937년 독일의 여객 비행선 힌덴부르크호 폭발 참사를 연상시킨다. 미국과 독일의 대립으로 미국이 헬륨가스를 공급하지 않아 발생한 사건이었다. 열강들의 야만적 대립과 갈등이 인류 문명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취소 표 쟁탈전은 개인 간 갈등을 넘어 소수의 자원을 두고 벌이는 세계적 분쟁의 축소판으로도 읽힌다. 소말리아인이 아프리카 대륙이 전체주의 국가에 수탈당한 역사를 언급하며 자신이 취소표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다.

'더 라스트 리턴'은 취소 표 대기자들의 말싸움이 막장으로 가는 과정을 통해 인류 문명사의 아이러니와 문명의 야만성을 드러낸다. 소말리아 모녀가 상봉하는 결말은 작위적이지만 메시지가 묵직하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앙상블이 뛰어나고 유쾌하다는 게 장점이다. 18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한다.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