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2일 경기 평택의 산부인과병원 진료실에서 만난 김영식 원장(가명·60)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7년 전 한 산모에게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시행한 뒤 그의 삶은 가시밭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병원 분만실 문을 닫고 싶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2016년 11월 20일, 김 원장은 일요일에 병원에서 야간 근무를 서고 있었다. 오후 11시 30분쯤 산모 한 명이 "오전부터 태동이 없는 것 같다"며 급히 병원을 찾았다. 김 원장은 20분 정도 태아 모니터링을 실시했다. 아기 심장은 분당 155회씩 뛰며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다음 날 0시 30분쯤 시작한 2차 모니터링에선 태아의 심박동이 불안정했다. 시간을 지체했다간 아기와 산모 모두 위험할 수 있다고 보고 곧장 응급 제왕절개 수술에 들어갔다. 오전 1시 33분 아기가 태어나면서 폭풍 같던 새벽은 그렇게 지나갔다. 김 원장의 기억에 그날은 산모와 아기를 모두 살린 날로 남았다.
그러나 그날 제왕절개 수술을 했던 산모 부부로부터 2년 뒤 소장이 날아왔다. 아기가 앓고 있는 뇌성마비의 책임이 김 원장에게 있다는 주장이었다. 김 원장은 의료과실이 없다는 감정서를 제출한 반면, 아기 부모는 뇌성마비가 '분만 중 원인 미상의 상해에 의한 분만 손상의 결과로 생각된다'는 감정서를 제출했다. 그는 당시 최선을 다했기에 소송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지만, 지난해 5월 내려진 1심 판결은 김 원장의 예상을 빗나갔다. 아이 부모에게 12억 원, 지연이자를 합해 16억 원을 물어주라는 판결이 나왔다.
12억 원이라는 큰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그의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법원 사람들이 들이닥쳐 방은 몇 칸인지, 세입자들은 살고 있는지, 가구는 뭐가 있는지 꼼꼼히 조사했다. 갑작스럽게 추락한 삶의 변화에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주변에서 건네는 위로의 말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저 의사가 수술한 아이가 뇌성마비 걸렸대"라고 손가락질이라도 당할까 봐 두려웠다.
김 원장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자신은 산모와 태아에 대한 주의 의무를 충분히 했고, 응급 상황에서도 적절히 대처했다는 점을 주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아이와 부모에게는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라면서도 "의사들이 이런 식으로 소송 위험에 내몰린다면 앞으로 산부인과 의사들은 씨가 마를 것"이라고 말했다.
소송 리스크 탓에 분만을 포기하는 산과(産科) 의사들이 늘고 있다. 산부인과 전공의들도 갈수록 산과를 기피하는 실정이다. 분만 수술 중 산모가 사망하거나 신생아사망·태아사망·신생아 뇌성마비 등 불가항력 의료사고가 종종 발생하는데, 진료 결과가 소송으로 돌아온다면 굳이 이 길을 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설현주 강동경희대병원 산부인과 교수가 2021년 산부인과 4년 차 전공의·전임의 등 2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세부 전공으로 "산과를 선택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47%에 달했다. 의사 10명 중 8명은 '분만 관련 의료사고 우려'를 산과 포기 이유로 꼽았다.
산과 의료소송은 ①태아와 산모가 겪는 사고가 급작스럽고 ②중증장애나 사망에 대한 보상대책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1994년부터 의료 전문 변호사로 활동해온 전병남 백인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출산 과정에서 산모가 사망하는 3대 원인이 양수색전증, 산후출혈, 임신성 고혈압인데 대부분 발병 원인이 명확지 않고 갑자기 발생한다"며 "젊은 여성이 멀쩡히 분만실에 걸어 들어갔다가 죽어 나오니 가족들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소송을 제기한다"고 말했다. 출산 이후 아이가 뇌성마비에 걸리면 평생 감당해야 할 간병비가 부담스러워 소송에 나서기도 한다.
산과 의료소송은 개인병원 의사들에게 특히 타격이 크다. 상급종합병원에선 병원과 변호인이 함께 소송에 대응하지만, 개인병원에선 의사 혼자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 전 변호사는 "소송 스트레스로 병원 문을 닫거나 개인회생을 신청하고, 의료사고 수사단계에서 자살하는 의사도 있다"고 전했다.
의료소송 금액도 점점 커지고 있다. 성원준 칠곡경북대병원 산부인과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산과 의료소송 분석'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23년까지 산과 관련 손해배상 청구금액은 평균 5억3,800만 원이었다. 최대 청구금액은 51억 원을 넘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평균 청구금액이 2억3,000만 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의사가 소송에서 패소해 환자 측에 물어준 금액도 7,000만 원에서 2억2,900만 원으로 3배 이상 늘어났다. 성 교수는 "1심 판결까지 평균 4년이 걸리고 대법원까지 8년 걸린다. 소송은 환자나 유족, 의사 모두에게 비극"이라고 말했다.
산과 의사들은 △진료기록부를 조작하거나 △분만 중 아기를 떨어뜨리거나 △당직 중 개인적 일로 치료 시기를 놓치는 등 명백한 과실에 대해선 의료진이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만 성실히 진료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호소한다. 김재유 안성 모아산부인과 원장은 "정부에서 의료 과실의 기준과 범위를 규정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주면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성사망이나 신생아 뇌성마비 등 분만에 따른 의료사고에 대해선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통해 최대 3,000만 원을 보상하고 있다. 그러나 의료 현장에선 금액이 너무 적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나온다. 실제 2021년 60.7%(107건 신청, 65건 합의 및 중재)였던 산부인과 의료분쟁 중재율은 2022년 56.0%, 2023년 52.7%로 줄었다. 홍순철 고대안암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3,000만 원으로는 뇌성마비에 걸린 아이의 간병비 대기도 어렵다"며 "모든 경제적 부담을 져야 하는 부모 입장에선 아이를 데리고 살려면 소송을 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일본에서 운영하는 '무과실 보상제도'를 주목하고 있다. 일본은 2009년부터 'JQ 시스템'을 도입해 신생아가 뇌성마비를 앓게 되면 3,000만 엔(약 3억 원)을 지원한다. 산모가 출산을 위해 입원할 때 신생아 뇌성마비에 대한 보험료를 지불하면 병원이 보험상품에 가입한다. 신생아가 실제 뇌성마비에 걸리면, 의사 과실과 상관없이 보험사가 3억 원을 부모에게 지급한다. 산모가 병원에 지불한 보험료는 정부가 출산장려금을 지급할 때 함께 주기 때문에, 뇌성마비에 대한 의료과실을 따지지 않고 정부가 보상금을 책임지는 구조다.
의료계 일각에선 3,000만 원 수준인 정부의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금액을 일본 수준인 3억 원까지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료진의 명백한 책임까지 면책하자는 게 아니라 의료 과실이 없는 분쟁에 대해선 획기적으로 보상금을 늘려 불필요한 소송을 줄이자는 취지다.
신생아 뇌성마비에 대한 개호비(간병비, 재활치료비 등)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환자 가족이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하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병원 측 소송 비용까지 떠안을 수 있기 때문에 완충지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의료소송 전문가인 김성주 변호사는 "의료과실 여부와 상관없이 신생아 뇌성마비에 대한 개호비를 지원하면 환자도 굳이 소송을 택하지 않을 수 있다"며 "일단 개호비를 지원하고 나중에 의료과실로 밝혀지면 정부가 병원을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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