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훈(35·가명)씨는 3월 12일 오후 3시 30분쯤 아내(30)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일하던 중 하혈이 심해 산부인과에 다녀오겠다는 전화였다. 별일 아닐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내가 태반이 자궁 벽에서 떨어지는 '태반조기박리' 진단을 받고, 응급 전원을 가야 한다는 얘기를 듣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상황이 안 좋으면 아기와 산모 모두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지방 출장 중이던 김씨는 곧바로 아내가 있는 충남 아산의 분만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한 시간은 이날 오후 6시 30분쯤.
병원에선 수술이 어렵다고 했다. 임신 25주 차는 너무 이른 조산이라 분만을 위해선 전문 의료진과 인프라가 필요했다. 하지만 해당 병원에는 신생아 인큐베이터가 없고, 이를 감당할 의료진도 없었다. 병원에선 응급 전원이 가능한지 알아보려고 전국의 상급병원 20여 곳에 연락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김씨는 사지로 내몰리는 기분이었다. 그저 아내가 건강하길 바랄 뿐이었다.
김씨는 119구급대를 집에서 부르라는 병원의 요구에 쫓겨나듯 나왔다. 집 앞에 온 구급차에 탑승한 시간은 오후 7시 25분. 하지만 구급대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1시간 30분 동안 충북·충남·대전·수도권 병원까지 전원을 의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존 외래 환자가 아니라서 안 받고 △25주 태반조기박리 상태라서 안 받고 △전공의가 없다고 안 받았다. 김씨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경기 성남 분당서울대병원에 연락해 보자고 했고, 다행히 전원이 허락됐다.
1시간 30분을 이동해 김씨와 아내는 이날 밤 10시 30분쯤 분당서울대병원에 도착했다. 하혈이 시작된 지 7시간 만이었다. 곧바로 응급 제왕절개 수술에 들어갔다. 20여 분 뒤 720g 남아 으뜸이(태명)가 태어났다. 김씨는 으뜸이 얼굴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출산 다음 날 병원에서 취재진과 만난 김씨는 긴장한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는 으뜸이가 아직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는 만큼 취재진에게 가명을 요청했다.
"저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지역마다 24시간 고위험 산모를 받아주는 병원이 있어야 안전한 출산이 가능할 것 같아요."
산부인과 의사들은 고위험 산모들을 받는 의료 최전선인 상급종합병원을 '지옥'이라고 부른다. ①밤낮없이 진료하다가 수술하고 ②의료 사고·소송 휘말리고 ③저연봉까지 감당해야 하기에, '이 길만은 피하자'는 자조적인 분위기가 전공의들 사이에 형성돼 있다. 산모를 돌볼 전문 의료진도 턱없이 부족하고, 이를 뒷받침할 병원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 미래는 더욱 암울하다. "차라리 제대로 망하고 재건하는 게 낫다"는 목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30년간 고위험 산모를 진료한 오수영 삼성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여섯 단계로 분만 인프라 붕괴 과정을 설명했다. 1단계는 저출생으로 분만병원이 급감하는 것이다. 2단계는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 감소(분만 취약지 증가) → 3단계: 지방대학병원 산과 교수 공백(전공의 부재) → 4단계: 수도권 대학병원 산과 교수 공백(전공의·전임의 부재) → 5단계: '빅5병원' 산과 전임의 미달 → 6단계: 산과 교수 멸종 위기다.
오 교수는 산과(産科)를 가르칠 교수가 없어 지원자가 없는 악순환이 이미 시작했다(6단계)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은 '적색 경보'(Red Alram) 가운데 가장 심각한 '울트라 적색 경보'(Ultra Red Alram)라고 진단했다. 오 교수는 "대책을 세우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까지 든다. 내 딸이 고위험 산모가 안 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일보는 8일 대한산부인과학회와 오 교수의 도움을 받아 전국 95개 전공의 수련병원의 산과 교수 현황을 전수조사했다. 산과 교수의 상당수가 50~60대라서 자연감소는 급격하게 진행됐다. 올해 기준으로 최근 2년 사이 교수(전임·임상)는 167명에서 158명으로 줄었다. 16명이 퇴임한 반면 충원된 교수는 7명에 그쳤다. 퇴임 교수들은 △정년 퇴임 3명 △사직 후 개인병원 및 국립·중소병원 취직 5명(난임 시술 전환 포함) △부인과 전환 1명 △미국 연수 및 미국 의사 전환 2명 △제약회사 취직 1명 △추적불가 4명이었다.
산과 교수의 고령화도 심각했다. 2014년에서 2024년까지 정교수는 25.4% 증가했지만, 부교수와 조교수는 각각 41.0%, 33.3% 감소했다. 고령 교수들은 많아졌지만, 젊은 피는 수혈되지 않은 영향이다. 교수들의 평균 나이는 49.1세까지 높아졌으며, 2039년까지 전체 교수의 절반 이상 (53.8%)이 정년 퇴임할 예정이라 교수 부족 현상은 갈수록 심화할 전망이다.
분만을 그만두고 국립병원으로 옮긴 베테랑 산과 전문의는 "밤에 잠 못 자고 약 먹고 일하는 교수들이 많고, 응급 상황이 수시로 떠올라 우울증 상담을 받기도 한다"며 "식사를 제대로 못 해 혈압약과 당뇨약을 복용 중인 의사들도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지방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산과 교수 158명 중 수도권에 100명(63.3%)이 몰려 있다. 비수도권(58명)의 경우 부산 11명, 대구·강원 7명, 충남 6명, 전북 5명이지만, 광주와 울산은 각각 1명에 불과해 차이가 컸다. 산과 교수 1명당 출생아 수(1분기 기준)를 비교해 보면, 광주가 516명으로 가장 많았고, 울산 467명, 충북 366명 순이었다. 수도권은 113명 수준이다.
광주·전남 고위험 산모의 '마지막 보루'인 전남대병원은 현재 전임교수 1명, 임상교수 2명, 야간 당직만 서는 촉탁의사 2명이 매달 60~70건의 고위험 분만을 감당하고 있다. 조선대병원이 사실상 분만을 중단하면서 고위험 산모들은 전남대병원에 몰리고 있다. 고위험산모·신생아통합치료센터장인 김윤하 교수는 1월에만 43건의 제왕절개 수술을 했다. 그는 한 달에 3, 4번은 인근 분만병원에 "병동이 꽉 찼으니 산모 보내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30년간 고위험 산모의 곁을 지킨 김 교수는 현재 63세로 정년까지 2년 남았다.
71세 산과 교수가 일주일에 두 번씩 밤을 새우며 당직을 서기도 한다. 대구·경북의 고위험 산모가 몰리는 칠곡경북대병원에선 산과 교수 2명으로는 감당이 안 돼 계약직 임상 교수를 채용했다. 응급상황은 밤낮을 가리지 않기에 당직 의사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젊은 산과 전문의를 교수로 모셔오기 어려우니 찾아낸 방편이다. 성원준 칠곡경북대병원 고위험산모·신생아통합치료센터장은 "출생률은 떨어지고, 수가는 낮고, 밤새 환자 봐야 하고, 응급상황 발생하면 병원으로 뛰어와야 한다"며 "그러다 환자 잘못되면 소송 걸려 수억 원씩 물어줘야 하니 누가 지원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한국일보가 2014년부터 2024년까지 경북대병원 산부인과 전공의 22명의 수료 후 진로(중도이탈 포함)를 추적한 결과, 의료 현장에서 분만을 받는 의사는 1명에 불과했다. 분만병원에서 일하는 전문의도 3명 있었지만, 주로 산전 진찰을 하고 있어 분만 현장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외 △부인과 5명 △미용 4명 △난임 4명 △휴직 3명 △중도이탈 2명이었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정헌 전북대병원 고위험산모·신생아통합치료센터장은 "지난 5년간 전북대 의대 산부인과 전문의 수료자 가운데 현재 분만을 받는 사람은 1명도 없다"며 "젊은 의사들이 분만을 기피하면서 전북지역 분만병원 최연소 원장님이 50대 중반"이라고 말했다.
고위험 산모를 위한 의료 체계가 무너진 이면에는 비현실적으로 낮은 분만 수가(의료행위가 발생해 국가가 병원에 지급하는 보험금)의 영향이 크다. 병원 입장에선 고비용·저수익 구조라서 분만을 포기하고 의료진 급여 등 고정비를 없애는 게 이득이다. 강동경희대병원에서 지난해 분만실 원가 분석을 해보니 연간 10억 원 적자였다.
과거에는 출산율이 낮지 않고 산모들도 젊었기 때문에 수가가 낮아도 병원이 그럭저럭 유지됐다. 그러나 인력과 장비를 많이 필요로 하는 고위험 산모가 급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임신 합병증에 따른 응급수술 등 조산이 많아지면서 신생아 집중치료실(NICU)의 규모가 커졌고, 산과·소아과 등 전문의 인건비도 이에 비례해 늘어났다.
강동경희대병원의 경우 산과 교수 2명, 촉탁의 1명, 분만실과 고위험산모센터 간호사 10여 명, 소아과 교수 2명, 신생아 집중치료실 간호사 10여 명이 분만을 담당한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분만 수가를 개선해 연간 3,000억 원을 추가 투입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의료 현장의 목소리다. 설현주 강동경희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지난해 수가 인상을 반영해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2억 원이 더 들어왔다"고 말했다. 적자가 10억 원에서 8억 원으로 줄어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고위험 산모가 안전하게 출산하려면 산과 의사만 필요한 건 아니다. 미숙아를 돌볼 소아과 전문의와 응급수술 때 필요한 마취과 의사, 과다출혈 때 시술할 수 있는 영상의학과 전문의도 필요하다. 여기에 해당 과마다 간호진도 충분히 뒷받침돼야 한다. 산과 의사가 있어도 소아과 의사가 없거나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자리가 없다면 고위험 산모를 받을 수 없다. 하지만 필수의료 붕괴로 해당 분야 전문의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 되면서 고위험 산모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러다 집에서 아이를 낳을 판"이라는 이야기가 결코 과장이 아닌 이유다.
제주도에서 헬기를 타고 전남대병원까지 200㎞를 이동해 응급 전원하는 게 익숙한 풍경이 돼버린 것도 분만 인프라 붕괴의 단적인 예다. 태명 '동백이' 엄마 이혜령(33)씨는 4월 9일 밤 11시 30분 갑자기 양수가 터져 제주대병원에 갔지만 인큐베이터에 자리가 없어서 분만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씨는 임신 30주 차인 조산이라 인큐베이터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아기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히 즉시 뜰 수 있는 헬기가 있어 10일 오전 10시 전남대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씨의 남편 현주현(33)씨는 "아기 둘을 갖고 싶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둘째를 갖는 게 부담스러워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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