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헝거 게임'은 2012년 나와 세계적으로 성공하자 5편까지 만들어졌다. 독재 국가의 열두 구역에서 희생양으로 뽑힌 청년 남녀 스물네 명이 칼과 활을 쥐고 생존경기에 나서는데 한 명만 살아남아 축복을 받는다. 부귀를 누리는 지배계급이 게임의 룰까지 바꾸고 전국에 생중계한다. 얼마 전 1편을 보았는데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다른 내용이면서도 닮은 설정들이 보였다. 청년들이 이런 서사에 호응하는 현실의 뒤에는 세계적인 경쟁을 일으킨 신자유주의, 일상에 퍼진 오디션들, '던전앤파이터'처럼 살고 죽이는 온라인게임들이 있지 않을까.
이 영화는 미국 소설 '헝거 게임'이 원작인데 나는 자연스레 영국 소설 '파리 대왕'(1954년)이 떠올랐다. 핵전쟁 후에 무인도에 불시착한 소년들이 리더로 삼은 랠프는 금발에 잘생긴 열두 살의 소년인데 우월감이 있다. 그는 구조를 위해 오두막을 짓고 봉화를 올리자고 하는데 결실에는 시일이 오래 걸린다. 그에게 몇 번 꾸지람을 듣고 헤어진 빨강머리 잭은 사냥술을 익혀 허기진 아이들을 그때그때 만족시키는데 무리는 점점 많아진다. 잭의 무리는 야만인 흉내를 내다가 광기가 퍼져 랠프의 아이들을 하나둘 죽이게 된다. 제목은 성경에 나오는 마왕을 말하는데 시신에 모이는 파리처럼 곳곳에 나타나는 인간의 마성을 뜻한다.
이 소설은 사실 영국 소설 '산호섬'(1857년)을 비틀었다. 랠프와 잭은 '산호섬'에도 나온다. 소년들은 무인도에 난파하자 배에 남은 망원경과 도끼로 사냥하고 움막을 짓는다. 다른 섬에서 불시에 닥친 야만인들, 해적들과도 싸우지만 지혜를 함께하고 의젓한 청년이 되어 배를 타고 귀향한다. '파리 대왕'에는 랠프 앞에 갑자기 나타난 해군장교가 "너희도 처음엔 '산호섬'처럼 잘 지냈단 말이지?" 하고 묻는데 소설 '산호섬'을 말한다.
나는 '일 분 후의 삶'이란 책의 개정판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재난을 당해 죽음을 앞둔 열한 사람이 실제로 겪은 일과 생각을 담은 논픽션이다. 이들을 만나 보니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대부분이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니 도와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맨홀에 빠져 암흑인 하수도에서 열흘가량 죽음과 싸운 사람도, 배에서 떨어져 캄캄한 인도양에 떠 있던 사람도, 감전사고로 한 팔을 잃고 살 힘을 잃은 사람도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고 살아났다.
'파리 대왕'과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남태평양 통가의 섬에서 십대 소년 여섯 명이 피지로 가려고 탄 보트가 1965년 폭풍을 만나 난파했다. 이들은 무인도의 해변에 닿자마자 기절해 여드레 동안 굶주렸다. 쇠약해진 상태로 삶을 시작했지만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 싸운 적도 있지만 힘을 모아 진흙 집을 짓고 물고기와 파파야를 나눠 먹었다. 어려워도 사이좋게 살다가 열다섯 달 후에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었다.
'헝거 게임'이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은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낯선 경쟁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 룰을 무시하며 돕고, 사랑해서 같이 죽으려고까지 하는 뜨거운 순간들이 있었다. 총선은 지났다. 우리의 현실은 혐오와 멸시, 갈등으로 쪼개질 듯하다. 하지만 지금은 위중한 시기인 것 같다. 결국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기에 우리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