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추방법' 통과 몇 시간 뒤… 영불해협 고무보트서 5명 익사 '비극'

입력
2024.04.24 20:00
영국행 난민 막겠다며 만든 '르완다 법'
법안 처리 직후 난민 5명 영불해협 익사  
"안전한 이주 경로 보장" 목소리 높아져

영국으로 향하던 난민 110여 명이 타고 있던 고무보트 엔진이 고장 나면서 7세 소녀를 포함한 5명이 익사했다. 사실상의 '난민 추방법'으로 비판받는 '르완다 법'이 논란 끝에 영국 의회를 통과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벌어진 비극이다. 단속을 강화하는 반(反)이민 정책으로는 난민들의 '목숨을 건 항해'를 막을 수 없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112명 탄 고무보트 고장… 영국행 난민 참변

23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BBC방송에 따르면 프랑스 북부 해안도시 비므뢰에서 출발한 보트가 이날 이른 오전 영불해협(영국해협)에서 엔진 고장으로 멈춰 서면서 배에 타고 있던 7세 소녀와 여성 1명, 남성 3명이 사망했다. 당시 보트에는 최소 112명이 타고 있었다.

프랑스 해안경비대는 해변에서 수백 m 떨어진 곳에서 47명을 구조하고, 수색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사고에도 불구하고 57명은 보트 엔진이 재가동된 뒤 영국으로의 항해를 강행했다.


프랑스 해안에서 소형 보트를 타고 출발해 영불해협 건너 영국으로 밀려드는 난민은 줄을 잇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지난 21일까지 6,265명에 달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 주도로 르완다 법이 마련된 이유다. 르완다 법은 이렇게 영국에 도착한 난민 신청자를 르완다로 우선 송환해 난민 심사를 받도록 하는 내용이다.

수낵 총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의 참석차 찾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 비극은 왜 제지(르완다 법)가 필요한지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범죄조직(브로커)은 항해에 적합하지 않은 소형 보트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을 태우고 있다"며 "그렇게 사람들을 바다로 밀어낼 때 비극이 일어난다. 이 비즈니스 모델을 깨고, 불법 이민을 끝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수낵 총리, 르완다 법 옹호 vs "법으론 이주 못 막아"

르완다 법이 22일 밤 영국 의회 문턱을 가까스로 넘은 지 몇 시간 만에 바다에서 참사가 되풀이됐다. 자연스레 이 법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조국을 떠나는 난민들의 이주를 법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현실적 이유에서다. 사고 직후 BBC와 만난 수단 출신 학생은 "아무것도 나를 멈추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아프가니스탄 출신 이드리스(24)는 "영국에 가기 위해 15번 시도했다"며 "지금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이게 내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비인간적인 르완다 법 대신 이들에게 안전한 이주 경로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엔버 솔로몬 영국 난민위원회 위원장은 "위험한 항해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절박한 이들이 절박한 행동을 취할 필요를 정부가 줄이는 것"이라며 "적대적인 법 대신 가족 상봉을 위한 더 많은 옵션, 난민 비자, 유럽 주변국과의 협력 등을 포함해 분쟁과 박해를 피해 쫓겨난 이들을 위한 안전한 경로를 마련해야 한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르완다 법 제정을 강행하는 영국 정부를 향한 비판도 쇄도했다. 필리포 그란디 유엔난민기구 최고대표는 "이 법안은 전 세계에 위험한 선례를 만든 것"이라며 재고를 촉구했다. 난민 지원 단체 '세이프 패시지 인터내셔널'의 완다 와이포르스카 최고경영자(CEO)는 "전적으로 예방할 수 있었던 사고"라며 "이는 정부의 실패로 난민들이 위험한 항해에 나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영국 제1 야당인 노동당은 르완다 법 폐지에 나설 뜻을 피력했다.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소형 보트의 횡단을 멈춰야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서도 "이는 잔꾀(르완다 법)로는 막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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