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벨의 연감, W.G. 제발트의 연감

입력
2024.04.25 04:30
26면
4.25 늙은 농부의 연감- 2


(이어서) 영국에서 독일어로 글을 쓴 독일 작가 W.G. 제발트(W.G.Sebald, 1944~2001)의 1998년 책 ‘전원에 머문 날들’(이경진 옮김, 문학동네)은 그의 문학세계에 큰 영향을 준 여섯 작가에 대한 경의를 담은 비평 산문집이다.
‘이민자들’ ‘토성의 고리’ 등 독보적 형식의 일련의 소설로 20세기 후반부 영어권 문단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 그가 저 책에서 자신의 첫 스승으로 꼽은 이는 19세기 초 독일 서남부 지역 농업 연감 ‘바덴 달력’을 편집하며 ‘라인 지방 가정의 벗’이란 필명으로 그 연감에 짧은 이야기와 에세이를 쓴 스위스 출신 목사 겸 작가 요한 페터 헤벨(Johann Peter Hebel, 1760~1826)이었다. 헤벨의 글들은 1807년 ‘라인 지방 가정의 벗의 보물상자’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고, 이후 잊히다시피 한 그의 글들은 발터 벤야민과 괴테 등에 의해 새롭게 평가받았다. 벤야민은 헤벨 100주기 평론에서 “19세기는 그의 책에 독일 문학의 가장 순정한 산문예술이 담겨 있다는 통찰을 편취당한 세기이며, 이 시대 사람들은 교양에 대한 자만심이 넘쳐 이 보물상자의 열쇠를 농부들과 아이들에게 던져 놓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위 책)고 평했다.

제발트는 “균형 잡힌 세계라는 이념”을 생생히 구현한 달력의 형식에도 주목했다. 프랑스 혁명의 난폭한 후폭풍과 이후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과 피비린내, 민족적 쇼비니즘과 소위 혁명적 애국주의 속에서, 제발트가 보기에 헤벨은 시간의 가지런한 순환과 거기 동조하는 농부들의 일상, 즉 균형 잡힌 세계의 내적 안정성을 ‘조용한 경탄’으로, 또 최악의 불행으로 향해가는 세상을 무겁게 예감하고 체념적으로 관조했다.
자기 민족의 범죄를 원죄처럼 품고 소멸이라는 시간의 질서에 간신히 기대 여전한 고통과 상처를 견뎌야 했던 제발트에게 헤벨의 연감(달력)이 어떤 의미였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최윤필 기자